재밌었던 것만
원래는 직장 생활 10년 동안 무엇을 배웠는지를 정리해보려 했으나
너어~~무 생각하기가 싫으므로
쓰면서 조금이라도 즐거울 수 있게 재밌었던 일만 떠올려보기로 했다.
써두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만 같은,
그러나 그렇게 잊기에는 너무 아쉬운 소소한 즐거움을 위주로.
최대한 시간 순서대로 간다.
1. XX고 친구들과의 교감
강사활동할 때, 1년 동안 매주 토요일에 고1, 2 친구들을 만났었다. 그러다 1년의 중반부쯤 내가 미국에 약 2주 정도 휴가를 가게 되면서 고맙게도 동료 강사 A가 수업을 대신해 줬었다. 그냥 지나가기 아쉬운 마음이 들어, 미국에서 구경 다닌 곳들의 사진을 이어 붙인 짧은 영상을 만들어 A에게 보냈다. A는 그 영상을 수업 시간 말미에 틀어줬는데, 영상을 보는 아이들의 반응을 다시 영상으로 찍어 나에게 보내줬다. 영상 끝부분에 아이들이 다 같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어찌나 감동적이던지.
미국에서 해리포터 굿즈인 온갖 맛이 나는 젤리를 사서 그다음 수업에 가져갔다. 다 같이 모여서 이런저런 맛을 먹어보며 웃고 떠들던 시간. 다른 강사 한 분이 구토 맛을 먹고는 화장실로 달려갔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너무 오래전이라 이제 아이들의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몇 번이고 다시 떠올리면 피식 웃게 되는 기억이다.
2. 첫 워크숍에 모두 늦은 직원들
초창기에는 동아리 규모의 정말 작은 스타트업이었던 우리 회사. 초반에는 대표가 직접 분기별 워크숍 프로그램을 짜다가 힘든 나머지 그 역할을 내게 주었다. 내가 주최하는 첫 워크숍이니 책임감을 가득 안고 정말 열심히 기획했었지. 고심하여 고른 워크숍 장소에 당일 아침 1시간 전에 도착해서 준비를 끝내놓았다. 천천히 진행 순서를 복기하며 동료들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시작 시간이 되어도 그 장소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점점 불타오르는 슬렉. "저 몇 분 늦어요"가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속 분노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동료가 정시보다 15분 늦었고, 가장 늦었던 동료는 1시간인가? 2시간인가? 아무튼 그 정도(그 정도면 그냥 아예 오지를 말아라).
심지어 분노에 어이없음을 더했던 자는 바로 대표였으니. 워크숍을 준비할 때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면서, 역할 넘기자마자 바로 지각행. 어찌나 밉던지. 그날 워크숍이고 뭐고 이런 무책임한 사람들 따위에게는 내 고퀄의 워크숍을 보여줄 가치가 없으니 바로 집에 가고 싶었지만 힘겹게 참았다. 나는 화가 나면 오히려 조용해지는 성격이라, 불같이 화내기보단 늦은 자들(=전원)에게 차분히 경고하고 프로그램을 수행해 나갔으며, 그날 모든 직원들은 내 눈치를 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전원지각을 할 수 있지?' 하면서 어이가 없는데, 왜 인지 지금은 이날의 해프닝이 우습게도 느껴진다. '재밌었던 어느 날의 기억' 정도로 미화되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난 지각하는 걸 정말 싫어해서 이후에도 회의 시간에 늦는 직원들이 있으면 (장난인척 하는 진심으로) 지각의 죄질에 따라 "곤장 X대"를 내리기도 했다. 물론 말뿐이었지만, 내 나름의 경고였달까.
3. 동료들끼리의 마법 테마 방탈출 게임
동료들과 방탈출 게임에 도전해 본 적이 있었다. 당시 테마가 2개였는데, 나는 당연히 마법 테마를 골라 나 포함 셋이서 한 방에 들어갔다. 이런저런 퀴즈를 푸는데 마법 세트들에 말이 안 되는 것들이 있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야 한다며 내가 한참을 구시렁대었는데, 힌트가 나오는 스크린에 갑자기 "죄송해요ㅠㅠ"가 떴다. 그때 동료들이 모두 빵 터졌고, 사장님이 내 말을 들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던 나는 사장님께 너무 죄송해서 카메라를 보며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나 진짜 꼴불견이잖아...?) 모두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겨서 정신을 못 차렸고, 생각할수록 더 웃긴 에피소드다.
4. 동료의 위로
남자친구와 싸운 채로 출근했던 어느 날. 조용한 사무실에서 앉아 일하기는 싫어서, 잠시 라운지에 나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동료가 노트북을 들고 와서는 내 건너편에 앉아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사실 울 것만 같아서 최대한 동료의 눈을 피하고 있었는데, 하도 쳐다보길래 어쩔 수 없이 나도 동료를 보았다가 동시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황당한데 묘하게 즐거웠다. 그 어떠한 말보다 위로가 되었던 그 순간, 그 동료.
5. 진짜 재밌었던 회식
날씨가 많이 흐린 금요일이었다. 당시 일부 재택이 가능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출근했던 직원이 많지 않았기도 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출근했다><) 가장 일찍 출근했던 동료가 사무실 불을 켜지 않고 있다가 뒤이어 출근한 사람들에게 놀래킴을 시전 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뭐랄까 마치 키즈카페에 모인 어린아이들처럼 신이 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날도 어두컴컴해서 일하다가 공포 사연을 한 두 개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러다 이른 저녁쯤, 날씨도 시원하니 갈비를 먹으러 가자는 누군가의 제안에 시작된 그 회식. 그날 아침부터 이미 텐션이 오른 상태였던 우리들은 술과 갈비가 들어가며 서로 미친 듯한 드립을 뱉어냈다.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웃느라 힘들었을 지경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하루였고, 순간순간이 선명하게 각인될 만큼 즐거웠다. 나는 파워 집순이라 보통 어딜 가든 집에 빨리 가고 싶어 하는데, 그날은 정말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꿀잼이었다. 이 날 만큼 많이 웃을 수 있는 회식이 또 있을까 싶다.
6. 저녁 먹으러 같이 가던 그 길
종종 야근할 때 자주 밥을 같이 먹던 동료가 있었다. 직무는 달랐지만 직급은 같아서 고민하는 지점들이 통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힘든 일들을 같이 대화하며 털어낼 수 있었다. 그 동료와 같이 식사하러 가면서 웃기도 화내기도 하며 수다를 떨던 길들의 풍경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밥을 먹으면서도, 먹고 돌아오면서도 계속 서로 말을 쏟아냈지만, 밥을 먹으러 가는 그 길이 특히 기억에 남아 있다. 좋아하는 동료와 + 힘듦과 즐거움을 나누며 + 맛있는 밥을 먹을 설렘의 복합적 즐거움일까.
일하면서 쌓아가는 성취감에 뿌듯했던 순간들도 분명히 많이 있다. 주로 노력해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거나, 몰랐던 걸 알게 되어 온몸에 에너지가 도는 짜릿함에 해당한다. 그러나 동료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훨씬 더 깊고 진하며 오래 지속되는 색으로 남아 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동료들을 나의 기억에 남겨둘 수 있어서 참 감사하다.
P.S. 이상하게 10년 중에서 최근 3~4년에는 즐거운 기억이 별로 없다. 벌써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정말 즐겁지 않았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