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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산

나는 흙수저다. 반짝이며 유혹하는 금수저가 아니다. 금으로 둘러 쌓인 지구를 상상해 보라. 지구가 흙이 아닌 금으로 되어 있었다면 휘황찬란한 황무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늘에 태양이 있다면 땅에는 흙이 있다. 자양분이 녹아 있는 흙. 생명의 보금자리 흙. 피조물을 잉태하는 흙.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흙이다. 나는 흙수저다.


자본주의 시대여서 그럴까? 유산이라고 하면 '누군가 남겨놓은 재산'이라는 어감으로 다가온다. 돈과 유산을 결부시킨다. 글쓴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은 '당신이 물려준 문화'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내 안에 숨 쉬는 숨결이다. 곰곰히 생각해 봤다.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떤 흙을 나에게 주셨을까?


끝도 없이 도전할 수 있는 호기심

부모님은 글쓴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여행을 즐기셨다. 집에 있는 사진 중, 누나를 임신했을 때 산 정상에 오른 사진이 있다. 그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행을 좋아하는 습성이 뼛속까지 존재한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어린이날 부모님 손 잡고 놀이공원보다 등산을 즐겼다. 설날과 추석 연휴에는 친가에 들렸다가 여행 가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아버지가 교환교수로 미국에서 1년 정도 살았다. 그 기간 중, 무려 4개월 동안 미국을 탐험했다. 그 후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여행을 하셨다. 트럭을 타고 남부 아프리카에 가셨고, 렌트카로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2011년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남미, 4개 대륙 28개국을 158일 동안 여행한 적도 있다. <꽃보다 할배>라는 TV 프로그램이 방영하기 전에 그들보다 먼저 세계여행을 마쳤다고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입가엔 자부심이 넘쳤다. 여행이란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이다. 정형화되어 있는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자연현상도 의심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돈이나 시간이 없어서 여행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계획을 여행에 맞추고 호기심과 용기만 있다면 여행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연합뉴스 인터뷰 中


- 세계일주를 하셨던 부모님 -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능력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살구색 잠옷을 입고, 거실의 흔들의자에 앉아서 한글과 한문이 범벅된 책을 보면서, 빨간색 펜으로 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아버지." 물론 책만 보신 것은 아니다. <동물의 왕국> 또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같은  TV 프로그램도 즐겨 시청하셨다. 침실부터 거실까지 책장이 즐비했고, 온갖 종류의 책이 꽂혀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대략 500여 권의 책이 있었다. 어렸을 때 줄곳 부모님께 들었던 말이 있다.

너희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건 책 밖에 없다.


어렸을 때는 집에 있는 모든 책을 가지고 가라는 말로 알아 들었다. 나에게 필요 없는 책을 굳이 주시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당신이 나에게 '책을 준다'는 뜻은, 물리적인 책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책을 읽는 습관을 물려준다는 의미였다. 그 안에서 지식을 탐색하고 지혜로 탈바꿈 하는 능력을 준다는 뜻이었다. 글쓴이의 책장에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책은 몇권 없지만, 당신이 물려주려 하신 정신이 한 가득 담겨 있다.


- 부모님의 책장 -



기록하는 습관

기록은 인간의 본능이다. 여행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기록이다. 글로 기록하기도 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하루는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동안 쓴 여행기 인쇄가 꽤 쏠쏠해. 1년에 2만 원이나 나와." 아버지는 여행이 끝나면 여행기를 책과 전자책으로 출판하셨다. 여행을 계획했던 내용, 여행하면서 느낀 점, 여행 중 이모저모를 책으로 모았다. 기록은 과거와 만나게 해 준다. 지금이라도 타임머신을 타고 싶다면 책을 펼치면 된다. 아버지는 글의 힘을 알게 해 주셨고, 기록의 위대함을 몸소 보여주셨다.



어린 시절, 필름을 감아 쓰던 은색 SLR 카메라를 처음 만졌다. 초점을 수동으로 맞춰야 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뿌연 사진이 나왔다. 한 장 한 장 공을 들여 사진을 찍었다. 가족 인원수만큼 사진을 인화할 수 없었다. 각각 사진 한 장씩만 인화해서 사진이 가장 잘 나온 사람의 사진첩에 끼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미국을 여행하면서 처음 비디오 캠코더를 영접했다. 8mm 테이프를 넣고 촬영했던 캠코더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1인칭 비행장면을 촬영하겠다고, 엘란트라 조수석에 타고 찍었지만 참패했다. 그렇게 영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학생 때 마술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단순히 취미였던 사진과 영상이, 지금은 직업 중 하나가 되었다.




근본이란 아버지와 어머니의 뒷모습이다. 그렇다면 글쓴이는 근본을 아주 잘 배운 사람이다. 부모님은 말로 다그칠 때도 있었지만, 묵묵히 당신의 등을 보여주셨다. 우리 남매는 그 등을 의지하며 이렇게 잘 성장했다. 차디찬 금덩이가 아닌, 매 말라 비틀어진 사막이 아닌, 비옥한 흙을 유산으로 주셨다. 끝없이 도전할 수 있는 호기심,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능력, 기록하는 습관이 부모님에게 받은 나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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