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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 Sep 13. 2023

공연 예찬

나의 당일치기 여행지

타고난 게으름뱅이인 내가 가장 아끼는 장소는 집이고, 가장 좋아하는 곳은 침대 위다. 약속은 주로 평일에 잡고, 일요일은 필사적으로 사수해 반드시 휴식을 취한다. 그런 내게 여행은 일상을 제법 크게 벗어나는 다소 번거로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마음먹은 건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경향도 있어서, 다섯 시에 패키지여행을 신청해 열한 시에 비행기를 탄 적이 있을 정도(하지만 그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패키지여행이 되었다…)로 마음이 동하면 또 훌쩍 떠나기도 한다. 다만 내게는 일상에서의 여유만큼 여행에서의 여유도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에 당일치기 여행이라는 건 적어도 나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다. 당일치기라니, 그런 걸 갈 바엔 집에서 여름엔 춥게, 겨울엔 덥게 하고 침대 속에 머무르는 편이 더 좋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내가 한 달에 적게는 한 번, 많게는 두세 번씩 다녀오는 여행지가 예술의 전당, 때때로 롯데콘서트홀, 세종문화회관이기도 한, 바로 공연장이다. 공연과 술은 이 게으름뱅이가 모처럼 부지런 떨게 만드는 신비로운 힘을 가졌다.


타인에게까지 ‘공연이 최고의 당일치기 여행’이라며 우길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만큼은 이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는 여행지는 없다. 실제로 누가 내게 비용을 대줄 테니 ‘동아시아 3박4일 VS 빈 필 내한 공연’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후자를 선택할 예정이다(물론 여행지가 유럽쯤으로 멀어진다면 그때부터는 고민이 조금 깊어지기는 한다).


공연장을 여행지에 비유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시간만큼은 반드시 일상과 단절되는 동시에 전혀 새로운 세계에 온전히 머무르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거라면 영화관에 가도 되는 거 아니냐고 물어올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영화 역시 가능한 영화관에서 보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건 집중력과 관련된 문제일 뿐이지, 공연이 전환하는 공간감은 영화의 그것과는 분명 그 크기가 다르다.


클래식 음악은 처음부터 현장에서 연주되기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다. 그렇기에 클래식은 라이브로 연주될 때 제 탄생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 음악을 만든 사람들은 모두 진작에 사라졌고, 그들의 의중을 이제는 알 방법이 없다. 오로지 악보로만 남아있는 음악을 연주자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해석해 낸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일에 대단한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처음 공연에 빠지게 된 것도 그 책임감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오선지에 콩나물+α로 존재하던 것들은 음악을 넘어 하나의 공간 자체가 된다. 다른 차원으로 온 것 같기도,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건 연주자들이 자신을 뽐내기보다는, 실력을 자랑하기보다는 창작자와 청중을 잇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단 한 번, 공연장 안에서 오직 그 순간에만 음악은 나타난다. 단지 그 순간에만 존재하며, 또 만들어짐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래서 살아있는 음악은 오로지 그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에게만 영원하게 저장되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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