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다. 다리미가 사망했는지 미처 몰랐다.
집에 들어와 배터리가 아슬아슬해진 휴대폰을 얼른 충전선과 연결했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하루를 한창 마무리하다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는데, 충전이 하나도 안 된 것이 아닌가. ‘어머, 이 선이 고장 났나? 아니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말이 되나?’ 급히 여분 충전선을 뒤적여 찾아내 다시 연결했는데, 여전히 먹통이다.
‘내일 못 일어나는 거 아냐?’
당황한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조그만 방안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이상하지, 이상해. 정전된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다 번뜩 생각이 난 거다. 그렇게 다급히 몸을 틀어 두꺼비집으로 달려간다. 역시나. 두 번째 버튼이 아래로 뚝 떨어져 있다.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히 버튼을 올리고 2초간 긴장의 시간이 흐른다. ‘후우’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제야 겨우 생각이 난 거다. 갑자기 버튼이 툭 꺼지더니, 생전 ‘POWER’ 모드에서도 뿜어낸 적 없던 크기의 스팀을 뿌려대던 다리미가. 워낙 정신이 없어 ‘이게 미쳤나…’하고 대충 코드만 뽑고 나갔던 아침의 기억.
그렇게 나의 핸디 스팀다리미는 운명을 다했다. 어지간히 집착스럽게 옷을 다려대다 보니 사실 본전이라면 뽑고도 남은 지 오래다. 아니, 녀석도 참. 이럴 거면 진작에 경고라도 좀 해주었다면. 그랬다면 틈나는 대로 새로운 다리미를 뒤적이며 요즘엔 얼마나 더 좋아졌는지, 가격대는 어떤지 확인이라도 했을 텐데. 말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갑자기 가버리다니.
그러다 문득 다시 깨닫는다. 사실 나는 지난 겨울 동안 다리미를 거의 쓰지 않았다. 잠깐 걸치고 나갔던 코트도 다음날이면 나가기 전에 무조건 다려입던 내가, 거의 아무것도, 아무 때에도 옷을 다려입지 않은 것이다. 그저 돌아오면 잘 걸어두는 정도로 최소한만 하고, 세탁기에서 꺼내 있는 힘껏 탁탁 터는 정도의 노력을 하고, 날이 풀리기가 무섭게 세탁소에 가져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고 보면 다리미는 내게 말을 걸 시간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거라면 조금 미안해지는데.
예전에 빨래를 글감으로 썼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집안일 중 빨래를 가장 좋아하고, 거의 모든 옷을 꼭 다려입는다고. 뮤지컬 <빨래>의 가사처럼, 빨래를 하면서 얼룩진 오늘 지우고, 잘 다려진 내일을 입고서 오늘을 산다고. 그렇게 밖에서 묻은 얼룩진 오늘을 내가 가진 겨우 그나마의 힘으로 지워낼 수 있는 빨래가 좋다고.
여름에 티셔츠 마저도 다려 입지 않으면 내가 유독 쪼글쪼글한 사람 같은 마음에 하루가 잔뜩 움츠러들고 마는 날도 있었다. 그때는 다 쓴 종이 접듯 꾸깃꾸깃 주름진 린넨 원피스를 당당하게 입고서 ‘입고 있음 펴져!’라고 말하는 친구를 내심 부러워하고는 했다.
완벽주의의 문제는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만들어 놓은 기준선(100점) 아래를 98점, 80점, 70점이 아니라 모두 0점으로 보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다리지 않은 모든 옷을 0점으로 알고 살았다. 그래서 매일 아침밥 먹을 시간은 없어도 다리미를 예열하고 옷을 다릴 10분은 꼭 필요했다.
지난 겨울의 내가 미쳤던 건지, 기특했던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여전히 그렇게 예고도 없이 떠나버린 다리미가 야속한 건지 후련한 건지 잘 모른다. 요즘의 나는 유독 급격히 변화하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되도록 응원해주려고 한다. 그러니까 아직은 지난 다리미를 위한 애도 기간을 가져보자고 마음먹는다. 여름 셔츠가 아무리 잘 털어도 꼬깃꼬깃해서 60점 아래로 받는 것 같을 때, 그때 새로운 다리미를 맞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