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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 Jun 03. 2024

어떤 불꽃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겪어본 일이 없어 모르겠지만,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헙'하는 신음이나, 놀란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공간이 메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반응은 의외로 정적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오히려 모든 반응이 멎은 것이었다. 한참의 기침 소리에도 그 기세가 잦아들 줄 모르자 그제야 소곤거림이 들려온다.

 ‘어머, 물을 준비해 두질 않았나 봐.’


 분명 수치스러운 일일 터였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을 터였다. 뒤늦게 건네진 생수통을 받아 들고 주저앉아 몇 모금 물을 마시고, 다시 조금 잔기침을 내보내고는 이내 일어서 자세를 잡는다. 이제 안절부절못한 것은 연주자를 바라보는 관객들뿐이었다. 거친 호흡으로 재개된 연주가 조금씩 안정을 찾는다.


 다시 마음을 놓고 연주 속으로 삼켜질 때쯤, ‘으으'하는 신음과 함께 다시 활을 쥔 손이 힘없이 툭 떨어진다. 다시, 정적.


 마지막 곡에서 그는 또 한 번,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를 되돌려 다시 연주했다.


 평범한 연주회였다면, 부푼 기대로 이곳에 왔을 사람들이 단숨에 비평가가 되어 이게 무슨 일인지, 어쩐 일인지, 살면서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에피소드를 세 차례나 목격했다며 입과 손가락을 놀리기에 분주하였겠으나, 그 후기는 평가가 아닌 감정에 치우쳐있었다.


 마지막 샤콘느 연주가 끝나자, 연주자는 감은 눈을 파르르 떨며 여운을 오래 가져갔다. 그런 그를 배려하듯 사람들은 바이올린에서 활이 멀어져 바닥을 향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앵콜은 어림도 없겠는걸?’ 옆에서 중얼거린다. 나는 동의의 의미로 나지막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커튼콜, 열댓 걸음을 부축받으며 조심히 걸어 나온 연주자는 객석 뒤쪽까지 몸소 걸어나가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어지간한 연주자라면 이런 공연을 마치고 도저히 웃는 낯을 비출 여유가 있을 리가 없으련만. 돌아서 무대 쪽으로 돌아온 연주자는 살짝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는다. 또 박수와 함성.


 5월 27일 월요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정경화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회였다.


 목요일에는 한 피아니스트의 연주회 공연 티켓을 양도받았다. 요즘 워낙에 몸은 바쁜 와중에 의욕은 뚝뚝 떨어지는 터라 별로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거절하기도 뭣한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공연장으로 향하게 됐다.


 슈베르트는, 난 그냥 그런데. 브람스랑 리스트는 좋겠는걸? 근데 프로코피예프 이거 가능한가? 하는 정도로 그저 좋으면 좋고, 안 좋아도 놀랄 건 없다는 마음이었다.


새까만 단발머리지만 어쩐지 그게 가발이라도 쓴 듯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인상의 노인이었다. 유려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담백하지만 단조롭지는 않은 연주였다. 괜찮은 슈베르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브람스, 몇 번 입이 쩍 벌어진다. 저 머리가 가짜인가, 아니면 그는 노안인가. 저 힘은 뭐지?


 어지간히 피아노를 부술 기세인 연주자들을 종종 본다. 그런 연주자들을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기 기세를 뽐내듯 뿜어내며 미스 터치를 밥 먹듯 하거나, 음을 뭉개버리는 연주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강한 기운을 뿜어내면서도 과장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인터미션에 결국 참지 못하고 연주자의 이름을 검색한다. 도대체 저 사람 몇 살이지?


Eliso Virsaladze (born September 14, 1942)


눈을 두어 번 비빈 후에 ‘이번 주 뭐냐, 진짜?’ 생각한다. 인터미션 후에는 더 굉장했다. 리스트는 물론이요, 프로코피예프까지 완벽했던 덕분이다. 도대체 80대 노인이 어떤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저런 힘을 꺼내놓을 수 있는지, 지금에사 겨우 돌아보지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잔뜩 몰아붙이는 시간이었다. 그때는 그저 연주자가 건네는 음악을, 그 힘을, 기운을 받아먹기만도 버거웠다.


 “야, 너는 그래도 자발적 백수잖아. 그리고 사실상 이제 대표님이잖아.”

 “너는 그래도 이렇게 시작한 자체가 이미 용기있는 사람이야. 그걸로도 난 이미 대단하다고 본다.”


 사람들의 응원인지, 격려인지 불분명한 말들을 나는 무책임한 위로로 들었다. 아직 곧게 서지도 못한 채로, 이게 맞는 건지 어리둥절한 채로, 창업이라는 출발선을 그리고 있다. 또 어쩌면 저기 뒤에 출발선은 이미 지나왔으면서 내가 직접 그린 순간이 출발선이라며 우겨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보다 두 배를 훌쩍 넘어선 시간을 버텨낸 몸으로 뿜어내던 열정을 생각한다. 걱정과 염려, 두려움에 잠식당해 후들거리는 다리로 서 있는 것이 고작인 지금 내가, 저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생각한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활활 타오르는 그런 빛나는 어른이 될 수 있는지 자문(自問)한다. 세월에 뒤처져버린 신체를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듯 끝까지 자신의 불꽃을 지키는, 그런 열정이 이제라도 내게도 생길 수 있을까.


 내게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 평균값을 계산해 봤을 때 여전히 지나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더 많은 내가 꾸려갈 오늘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생각한다.


 그런데도 오늘도 여전히 불안 속에서 그나마의 용기를 꾸역꾸역 삼키거나, 못 참고 뱉어내고 만다. 연주자로서 가장 수치스러울 순간에도 다시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던 한 연주자를 품는다. 인자하고, 포근한 할머니가 아니라, 단호한 얼굴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건반을 찍어 누르던 한 피아니스트를 새긴다. 적어도 한 걸음, 내일도 또 한 걸음 걸어보자고 마음먹는다. 나는 이제 겨우 출발선을 지나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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