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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May 11. 2019

꼰대와 싸가지

관계의 목표

인간의 서글픈 진실 가운데 하나는 이 눈물 많은 골짜기에서 우리가 정말로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원히 혼자다. … 이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다른 점보다 닮은 점이 훨씬 더 많다. 우리 모두 인간인 까닭이다.      - 로버트 맥기


 사람들잡음 없는 관계를 원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상일뿐 현실은 다르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번 상대의 개입으로 불편해진다거나 상대에게 거부당해 씁쓸해하기 십상이다.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받은 상처로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관계에 지친 우리는 편한 길을 택한다.

자신의 영역을 쉽게 침해하는 타인은 피하고,

선한 의도의 말조차도 관계가 어그러질까 두려운 타인에게는 ‘진짜의 말’을 아낀다.

더구나 점점 복잡해져 가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오해하지 않을 방도를 찾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그러다 보니 차라리 대화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것이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방도로 여겨지는 듯하다.

이를 반영하듯 서점가에는

‘적당한 거리두기 기술’, ‘약간의 거리를 둔다’ 등

‘거리두기’를 주제로 한 책들이 넘

쳐 난다.


 사실 웬만한 ‘애정’이나 ‘관심’ 아니면 상대를 알 수도 없다.

알려고 하는 질문조차도 상대의 콤플렉스와 직결된 것일 수 있으므로 조심스럽다.

자신의 곪은 상처를 들춰보는 일은 자신이나 상대나 쓰라리니까.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른 상대와 관계를 맺어 가는 것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가. 그 에너지를 소모하면서조차 타인을 알려고 하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가.


20~30대는 관계에 쿨하다.

 이를 아는 까닭일까?

근래의 10~20대는 관계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름 친하다고 해도 상대에게 깊은 관여나 간섭을 하지 않는단다.

자기 영역도 확실하고, 타인과의 경계도 명확한 편이다.

평균 한 두 명 정도의 형제들 사이에서 자기 방 하나쯤은 소유하고 살고

물질적으로도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자라온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라고 감히 추론해본다.

그들은 형제간에 먹고 입을 것을 위해 그다지 고투해본 적도 없고,

싸워본 적이 많이 없으니 눈물 흘리며 화해해본 경험도 적을 것이다.

누군가와 살 부대끼며 살 필요가 없는 환경에 있다 보니 상대는 멀리 있는 벽처럼 느껴질 뿐이다.

교류나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 타인은 그들에게 그저 영원한 타인일 뿐이다.    


 반면, 나이 든 세대는 관계에 대한 집착의 정도가 더 한 경향을 보인다.

나이 들수록 친하지 않아도 쉽게 타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과 타인과의 경계가 불명확하고, 자신과 타인이 다르다기보다는 비슷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자식에게는 ‘너는 나고, 나는 너야’라는 (젊은 세대가 느끼기엔 다소 폭력적인)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먹을 게 모자라 자신을 버리고 싸워오지 않았는가.

눈물 흘리며 화해하면서 형제에게 양보한 음식이 자신의 영혼의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한 세대다.

그들에게 타인은 영원한 타인이라기보다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다.


 내겐 그 잡음 많은 수많은 관계 중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의 잡음이

좀체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이들의 소통은 대개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답답해하며 핏대 올리며 싸우다 종국에는 관계가 틀어진다.

그나마 평화적이라는 대화조차도 들여다보면,

분란이 싫으니 마음을 닫은(혹은 대화를 포기한)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의견을 온전히 수용하는 척하면서 끝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타인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다.

결국은 서로가 이토록 다른데,

이렇게 에너지 낭비를 해가면서까지 서로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포기한다.

서로 간의 진실한 소통은 귀찮은 것이 되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는 낭비가 되니 말이다.

그저 적당히 이해하는 척하고, 공감하는 척하고 넘어가버리는 것이 관계의 비법이라고 여긴다.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감정도 다치지 않고, 관계도 틀어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그저 수용하는 척, 공감하는 척, 이해하는 척하면 적어도 상대에게 불편함은 사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가는가.

그들의 선한 진심은 다름 속에서 왜곡된다.

그 다름은 알 수 없어서 생기는 다름이라기보다는 알기 피곤한 데서 오는 다름이다.

서로에 대한 불편함이 쌓이다 보면 이들은 서로를 순수하게 공유하거나 공감하기보다는

서로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날을 곤두세우는 형국이 된다.

여전히 이들 사이에는 많은 강물이 흐르고,

각자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물에 갇힌 섬 속에서 제각각 사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 섬 속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어차피 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다소 불편하고, 몸과 마음에 스크래치가 날지언정

‘이해’의 다리를 짓고 다른 섬으로 건너가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건넜다가 너무 불편해져서 되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건너지도 않은 채 ‘알고 보면 편한 곳’을 불편한 곳으로 착각하는 안타까움은 적어도 없으니까.

건널 수 있는 섬이 많아지면 인생은 더욱 재미있고, 다양하고 풍요로워진다.

건너면서 강물의 깊이까지 짐작하는 혜안까지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최대의 공유와 교류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관계의 목적’이라고 믿는 내게는 더더구나 그렇다.


 앞으로 연재될 이 글에서는 여러 종류의 관계 중,

세대 차이에 의한 갈등 관계에 대해 거침없이 다룰 예정이다.

독자들은 이 글을 통해 젊은 사람들에게

흔히 ‘꼰대’라고 일컬어지는 나이 든 사람과,

나이 든 사람들에게 ‘싸가지’라고 불려지는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 이 문제는 단지 나이가 많고 적음에서 비롯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이와 관계없이 개인주의의 정도에 따른 개개인의 스타일에 따른 특징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 관계는 일반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로 확장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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