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들

아는 사람B

by 일향지


월요일 새벽 두 시. 평소라면 다음 날 출근을 생각해 잠이 들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드라마가 줬던 흥분을 놓기 싫었던 것일까, 지금과 다를 내일이 두려웠던 것일까? 평온함과 긴장감이 동반된 밤이었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체온을 재보니, 늘 그렇듯 어딘가에 몰입한 후의 그 온도, 37.5도다.

평일 내내 오만한 흰 가운들에게서 쌓아온 피로감을 나는 주말에 드라마를 몰아보는 것으로 해소하곤 한다. 장르는 멜로물. 인기리에 방송됐던 미니시리즈 16편이다. 내용은 두 커플의 남녀가 서로 싸우다가 화해하다 사랑에 성공하는 뻔한 얘기다. 그러나 이제껏 내가 좋아하는 남자와 나를 좋아하는 남자의 유형이 극명하게 갈려 늘 연애에 실패해 온 내게는 이만한 연애교과서가 없다.

드라마 작가는 실장님이라 불리는 남자 주인공에게 온갖 세속적 액세서리를 갖다 붙이고, 둘 사이에 다수의 방해물을 설정한 후에 엄청난 밀당을 통해서 최고의 결합을 이끌어낸다. 그 결합은 나 같은 연애 고자에게는 지나치게 짜릿하다. 그 실장님이 사이비 대체물이든 내 욕망을 우회적으로 실현하는 대상이든 상관없다. 내 관심은 오로지 하나. 현실에서 억눌린 나의 욕망을 제도권 내에서 어떻게 충족할 것인가? 더 나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연애 고자를 벗어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방금 본 드라마가 다른 점이 있다면, 실장님 캐릭터는 등장하는데, 혀 짧은 소리를 내거나 맹한 여자는 안 나온다는 점이다. 최근 떠오르는 여성 캐릭터들은 대개는 그렇다. 완벽해 보이지만, 1퍼센트가 허술한 여자다.

내 주위에도 그런 여자가 있다. 고교 시절부터 절친이며 지금은 내가 영업처로 자주 들르는 건물에서 근무하는 약국의 약사 박민정. 그녀는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해 보이는 여자다. 감정 통제력도 강했고, 매사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는 허술한 1퍼센트라면, 그녀 얼굴에 있는 사마귀 같은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기 며칠 전, 비 오는 하굣길에서 우연히 민정의 코 아래에서 어색해 보이는 부분을 발견했다.

“이거 점이야? 사마귀야?”

“아! 사마귀.”

“내가 그동안 왜 못 봤지? 갑자기 생긴 거야?”

“계속 있던 건데, 매일 바르던 컴펙트가 빗물 때문에 지워져 버렸네”

“너 그럼 3년 동안 애들 몰래 매일 바르고 다녔던 거야?”

“어. 호호. 감쪽같았지?”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의 얼굴에 있는 치부를 영영 몰랐을지도 모른다.

나의 뇌에 그녀에 관한 수많은 데이터가 몇 억 개의 뉴런을 통해 신경 신호를 사방으로 난사되고 있을 무렵,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새벽의 전화는 낯설고, 낯선 것은 당황스럽다. 혹시 나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고백 전화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