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5일 · 서울시 중구 예장동>
밤이었다.
도시의 불빛이 구름에 스며든 하늘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빛과 어둠이 엉킨 그 도시 아래,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총 대신 키보드, 칼 대신 코드.
피 대신 데이터가 흐르는 전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보다 더 정밀하고 잔혹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레인보우 키퍼의 정보 책임자 ‘옐로우’.
사라진 실체, 그러나 모든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는 자.
그리고 또 한 사람.
그가 한때 ‘제자’라 불렀던 인물.
지금은 그를 정조준하고 있는, 함민주였다.
남산 기슭. 폐쇄된 구 정보국 건물.
지하 3층, 창문 하나 없는 방.
꺼진 형광등 아래, 은빛 서버랙이 뱀처럼 길게 뻗어 있었다.
방의 중심.
어두운 조명 아래, 옐로우가 앉아 있었다.
스크린 아홉 개가 일제히 깜빡였다.
마우스 소리, 타자음.
쉼 없이 움직이는 그의 손끝에서 숨 같은 소리들이 흘렀다.
화면마다 서로 다른 암호, 익명 계정, 조작된 신원.
누군가의 삶을 한 줄의 명령어로 지우는 일.
그는 그것을—예술처럼 해냈다.
감정은 오래 전에 삭제되었다.
이름도, 얼굴도,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는 시스템이었다.
조직이 숨기고 싶은 모든 것, 지워야 할 흔적을 말 없이 처리하는 침묵의 메인프레임.
그런 그가, 지금—
멈칫, 하고 있었다.
한 이름.
한 사람.
그의 기억에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잔상.
함민주.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그녀의 ‘처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백도 없고, 줄도 없던 아이.
그저 평범한 선발 평가를 치르러 온 신입 요원.
그러나, 단 한 번의 눈빛만으로 그녀는 평범함에서 이탈해 있었다.
“이 보고서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왜 누락됐죠?”
“삭제 명령자는 누구입니까?”
“조직이 은폐에 가담한 건가요?”
단도직입.
단정한 말투.
그러나,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고집.
그는 처음엔 그녀를 귀찮아했다.
그러나 동시에—묘하게 끌렸다.
그는 그녀에게 경고한 적이 있었다.
“감정은 약점이다. 이 시스템에서, 흔들림은 곧 파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날 이후, 그녀는 모든 시스템에서 자취를 감췄다.
브리핑룸 마지막 줄에 앉아 있다가 말없이 뒷문으로 나가던 뒷모습.
그 등은 무표정했지만—그는 알았다.
그녀는 그냥 떠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뒷모습은 잊히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지우지 않았다.’
기록은 삭제했지만, 기억은 남겨두었다.
그녀는—처음부터 단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날 밤, 스크린 위에 민주의 얼굴이 다시 떴을 때—그는 깨달았다.
그녀는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애초에,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 * *
같은 시각, 다받아 고물상 2층 사무실.
민주는 전등 하나만 켠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 불빛이 책상 위를 적시고, 그녀의 눈동자엔 흔들림 없는 각오가 맺혀 있었다.
그녀는 CCTV 추적을 멈췄다.
대상은 더 이상 장춘동이나 퍼플이 아니었다.
그림자처럼 숨어 움직이는 자.
한때 ‘스승’이라 불렸던, 그 이름조차 없는 남자.
옐로우.
그는 모든 흔적을 지웠다.
접속기록, 암호화 채널, 삭제된 파일 속의 삭제기록까지.
그의 이름은 시스템에 없고, 얼굴은 어떤 데이터에도 없다.
그러나 민주에게는—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미끼를 작동시켰다.
조작된 로그, 설계된 오류,
가짜 IP와 완벽하게 감춘 코드 꼬리표.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단 하나의 문장.
“R.K. 7인의 실명 리스트 확보 중.”
그 문장 하나면 충분했다.
그가, 물지 않을 리 없었다.
민주는 손끝으로 전송을 클릭했다.
작은 불빛이 화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 * *
새벽 0시 13분, 옐로우의 사무실.
수십 개의 스크린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갑자기 번쩍이며 경고음을 띄웠다.
[비인가 접근 감지 – 암호화 파일 수신 요청]
[접속자: HMJ 추정]
[특수 채널: R.K. 내부망 경유 – 48초 경로 회피 감지]
옐로우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낮은 목소리가 스치듯 흘렀다.
“… 왔군, 민주.”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허용’을 눌렀다.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시간을 거슬러 도착한 것 같은, 조용하고 흔들림 없는 인사였다.
“당신이 지워온 이름들, 우리가 되살릴 겁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어둠 속에 숨지 마세요.”
옐로우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감정이란 감각은 오래 전에 버렸다고 믿었지만—
이름 하나, 목소리 하나에 잔물결이 일었다.
“역시… 감정으로 싸우는구나, 넌.”
민주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리고 당신은, 아직도 감정을 두려워하죠.”
그 순간—
연결이 툭, 끊겼다.
모든 스크린이 다시 무표정한 빛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적.
민주는 노트북을 조용히 덮었다.
* * *
사무실은 숨도 멎은 듯 고요했다.
민주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을 떠올렸다.
남산 지하, 좁은 브리핑룸.
문을 나서는 그녀에게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도 언젠가 사라질 거예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민주가 기억하는 건, 조용히 멀어지던 그의 등짝뿐이었다.
“… 이건 복수가 아니에요.”
민주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지워진 사람들의 기록을, 되살리는 일일 뿐.”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두려움도, 미련도.
—그 시각.
옐로우는 조용히 명령창을 열었다.
[추적 명령 승인 요청: HMJ-004]
[등급: 레벨 3 / 실행권자: YELLOW]
그는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눌렀다.
느리지만, 단호하게.
“… 함민주.”
“넌 날 선생님이라 불렀지만, 처음부터 내 적이었구나.”
그날 밤. 서울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무지개 이면의 전쟁은, 조용히… 아주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날.
도시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아침을 맞았다.
그러나 서울 종로구 어느 깊은 골목 어귀 끝자락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하나 있었다.
한낮에도 어스름이 깔린 그 골목 끝에는, 세련된 한옥을 개조한 고급 음식점 ‘꽃’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간판은 없다.
다만 대문 기둥 옆 작은 돌판에, ‘꽃’이라는 한 글자가 은은하게 새겨져 있을 뿐.
고개를 갸웃할 새도 없이, 검은 정장 차림의 직원이 다가와 조심스레 문을 열어준다.
안으로 들어서면, 백자 향과 고급 백단 나무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폭신한 카펫이 깔린 좁은 복도를 지나면 넓은 홀과 각기 다른 콘셉트의 룸들이 펼쳐진다.
대청마루를 개조해 만든 메인홀에는 고급 한식과 양식 몇 가지만 정갈하게 차려진다.
술도 마찬가지.
발렌타인 30년산, 로마네 꽁띠, 로얄살루트 62년….
가격표가 필요 없는 술들만,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꽃’은 전두칠이 과거 사용하던 안가를 장춘동이 사들여, 정·재계 유력 인사들을 비밀리에 접대하고 포섭하는 전진기지로 탈바꿈시킨 곳이었다.
철저한 회원제. 비밀 유지를 목숨처럼 여긴다.
휴대전화는 입구에서 모두 압수되고, 룸마다 노이즈 캔슬링 장치와 전파 방해기가 설치돼 있다.
그리고 이곳의 마담은 ‘배주란’이었다.
50대 중반임에도 30대라 해도 믿을 법한, 탱탱한 피부와 매혹적인 보조개.
목소리 한 톤, 눈빛 한 번에 남자의 심장을 낚아채는 여우 같은 여자.
20대 시절, 은막을 장악한 톱스타였던 그녀는 장춘동의 애첩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유도 모른 채 장춘동은 그녀를 멀리했고—
배주란은 과거를 잊은 듯 ‘꽃’의 마담으로 변신해 다시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녀 밑에는 ‘새끼마담’이라 불리는 세 명의 여자가 있었다.
고객 접대는 물론, 손님의 기밀을 은밀히 수집하는 일.
그게 그녀들의 또 다른 임무였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셋 중 하나가 자취를 감췄다.
실종인지, 잠수인지, 혹은 보이지 않는 손의 공작 때문인지—
알 길은 없었다.
어쨌든, 급한 충원이 필요했다.
그날 오후. ‘낸시’라는 이름의 여인이 ‘꽃’을 찾았다.
영국계 필리핀인 출신으로 위장된 그녀는 매끄러운 영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면접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냈다.
나이는 45세라 했지만, 맑은 눈매와 가느다란 목선, 살짝 올라간 쿨한 미소까지—
30대 초반의 매력을 자연스레 뿜어냈다.
배주란은 단박에 그녀를 마음에 들여놓았다.
‘낸시’는 단순한 미인형이 아니었다.
깔끔한 말투, 적당한 거리감, 무엇보다 어설픈 야심 대신 고급스러운 여백을 풍기는 여자.
“이쪽 일은 처음이라 하셨죠?”
배주란이 웃으며 물었다.
“네. 사람 상대하는 건 익숙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에요.”
낸시로 위장한 엘린은 웃음기 없는 단정한 미소로 답했다.
그 겸손함.
그 긴장감.
그리고 미묘한 기대감까지—
낸시의 모든 것이 배주란을 만족시켰다.
그날 밤.
장춘동이 검은 코트를 입고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경호원과 안내인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그를 맞았다.
그의 코트 자락엔 금방 들른 국회의사당의 향내보다 더 진한, 권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익숙한 듯 복도를 지나 VIP룸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 배주란이 은빛 목걸이에 단정히 빗은 머리칼을 하고 직접 나와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그녀의 미소는 노련했지만—
그 안엔 긴장감이 서늘하게 굳어 있었다.
장춘동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는 앉자마자 물었다.
“미쓰 변이… 사라졌다고?”
음성은 낮았지만, 그 안엔 분명히 노기가 서려 있었다.
배주란은 눈을 잠시 내리깔았다가 말했다.
“일주일 전쯤입니다. 예고도 없이… 완벽하게 증발했어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안에서 들끓는 두려움을 감추진 못했다.
장춘동은 그녀를 노려보다가, 서서히 시선을 거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쓰 변. 그년… 쓸만했는데.’
몸도 탱탱했고, 테크닉도 나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눈을 들던 눈빛, 잔 안의 술보다 더 짙었던 복종의 태도.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했지.
욕망에 충실하고, 한없이 아래로 엎드릴 줄 아는—그런 여자.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지우며 내뱉었다.
“여자는 소모품일 뿐이지.”
그의 입꼬리에 노골적인 경멸이 스쳤다.
잠시의 정적. 배주란이 살짝 몸을 돌렸다.
“그 대신… 괜찮은 아이를 한 명 새로 뽑았습니다.”
그녀가 문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낸시, 들어와.”
문 밖에 대기 중이던 낸시—
아니, 엘린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흰 셔츠에 진주빛 목걸이, 단정한 올림머리.
그 순간, 장춘동의 눈빛이 번쩍 흔들렸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낯선 충격.
‘… 린?’
아니.
닮았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았다.
린은 투명했고, 작았고, 숨결 하나에도 금방 눈물이 맺히던 아이였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달랐다.
차갑고 단단한 눈동자, 얼굴은 닮았으되 느낌은 전혀 달랐다.
그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낸시입니다.”
장춘동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잠시, 아주 짧은 정적.
그는 입술을 다문 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주란이 눈치 빠르게 응수했다.
“아주 똘똘하고, 매력적인 친구예요.”
“…그래.”
장춘동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몸을 틀자마자, 입가가 살짝 떨렸다.
속이 들끓고 있었다.
그게 의심인지, 예감인지, 아니면 망령 같은 집착인지 알 수 없었다.
린의 잔상은 53년 전, 오래 전에 덮어버린 페이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 낯선 여자의 눈동자가
그 오래된 기억을 거침없이 찔러 깨우고 있었다.
“…린.”
그 이름을 내뱉고, 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왼손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눈빛은 분명했다.
그는 보안 채널을 열고, 메시지를 입력했다.
「낸시라 불리는 새끼마담의 출신을 확인해라. 가능한 모든 기록을 긁어모아라. 그리고—53년 전 베트남 닌호아 하이난 거리 립스틱클럽에서 일하던 린이라는 여자의 자취도 함께 찾아. 남아 있는 게 뭐든.」
전송.
그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본 채, 다시 한 번 낮게 중얼거렸다.
“린… 린……”
그 이름은,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의 구석에서 서늘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균열은, 거기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