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그날 밤, 그 곳에서 악마가 태어났다

<1972년 4월 · 베트남 닌호아 백마부대>

by 부지깽이

“그만!”

벼락같은 외침이 내리꽂혔다.

중대장 장기동 중위였다.

막사 천막이 찢어질 듯 펄럭였다.

단정한 군복, 정돈된 걸음, 매서운 눈빛.

“장 하사!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장 중위는 규에게 곧장 다가갔다.

쓰러진 몸을 부축하며, 입술의 피를 닦아주는 손길엔 분명한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장 중위가 규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 뒤, 장춘동을 바라봤다.

“설명해 봐.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장춘동은 고개를 돌렸다가, 입술을 적시며 중얼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수색 도중에…”

“박 병장.”

장 중위는 장춘동의 말을 끊고 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규는 입 안에 고인 피를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장 하사가 끼엠 마을에 가서 또 행패를 부렸습니다. 수색작전 명목으로 주민을 폭행하고, 부녀자들을 겁박하고, 집안 살림까지 뒤엎었습니다.”


장기동의 미간이 좁아졌다.

“장 하사. 사실이야?”

장춘동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고 말했다.

“베트콩에 협력한 자들을 색출하려던 겁니다.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장 중위는 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박병장은 왜 밟고 있었어?”

장춘동이 재빨리 대답했다.

“박 병장이 상황을 오해하고 먼저 덤비는 바람에…”

“오해 아닙니다!”

규가 소리쳤다.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엔 물러섬이 없었다.

“확인해 보시면 바로 나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장 중위는 아무 말 없이 장춘동을 바라봤다.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 하사.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지?”

장춘동은 쏘아보는 장 중위의 눈을 피했다.

한 번만 더 민간인 괴롭히면 군번줄 뺏고 최전방으로 보내버린다고 했을 텐데.

장춘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장 중위는 말을 이었다.

“요즘 부대 분위기 안 좋은 거 알지. 이번 한 번만 더 봐주겠다.”

그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다음번엔 바로 영창이다. 알겠나?”

장춘동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해산.”

장기동 중위는 뒤돌아 막사로 들어갔다.


남은 건 규와 장춘동.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장춘동이 먼저 돌아섰다.

박규는 그 자리에 남았다.

옆구리를 움켜쥐고, 몸을 세웠다.

숨은 깊고 거칠었다. 이가 부딪혔고, 두 눈엔 열이 맺혔다.

무릎에 힘이 빠졌고,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 멀리 끼엠 마을 위 하늘은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가득했다.

규는 주먹을 천천히 말아쥐었다.

팔이 떨렸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말보다 깊은 다짐이 내려앉았다.

* * *


반대편 하늘도 흐렸다.

구름이 낮게 깔려, 눌러앉은 듯 답답했다.

햇빛은 없었지만, 장춘동의 속은 끓고 있었다.

장기동 중위.

그나마 같은 편이라 여겼던 인간.

그가, 그놈이 부하들 앞에서 자기를 그 따위로 깎아내릴 줄은 몰랐다.

“군번줄을 뺏겠다니, 영창이라니…”

그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서운함? 그건 사치스런 감정이었다.

지금 장춘동의 마음 속을 휘젓는 건 모욕감이었다.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수치감이었다.

입안은 바싹 바싹 말랐고,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었다.

결국 그는 고삐풀린 말처럼 하이난 거리로 뛰쳐나갔다.


술이 필요했다.

지금 이 더러운 기분을 지울 만큼 독한 술.

그리고—

여자.

그는 익숙한 간판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돌았다.

어두운 조명, 싸구려 향수, 퀴퀴한 담배 냄새가 가득찬 여자 있는 술집.

그곳에서 그는 소리쳤고, 웃었고, 유리잔을 부쉈고, 여자를 샀다.

거친 손으로 처음 본 여자의 허리를 잡아챘고, 목덜미에 입을 박고 욕을 뱉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또렷해졌다.

린.

그녀의 미소, 하얀 앞치마.

카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웃던 모습.

그것은 손으로 잡히지 않는, 이제는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더럽힐 수조차 없는 빛이었다.

“왜… 왜 너만은…”

장춘동은 이빨을 갈았다.

눈은 충혈됐고, 손끝은 떨렸다.


그의 몸 안에서 끓어오른 건 성욕이 아니었다.

결핍이었다.

질투였다.

폭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술집으로 향했다.

비슷한 조명, 비슷한 냄새, 비슷한 여자.

그러나 전혀 채워지지 않는 욕망.

그는 반복했다.

술, 여자, 난동.

술, 여자, 난동.


하지만 린은 닿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밤 아홉 시가 가까워질 무렵.

밤바람은 잔잔했지만 눅눅했고, 하늘엔 별 하나 없이 깜깜했다.

장춘동은 술에 절어 군복 단추 몇 개가 뜯어진 채 비틀비틀 부대로 돌아왔다.

부대 정문을 통과해 막사로 향하던 장춘동 앞에 짚차 한 대가 불쑥 멈춰 섰고, 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장 하사!”

익숙한 목소리였다.

조수석 창 너머로 연대장 전두칠 대령의 얼굴이 보였다.

장춘동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흐느적거리던 몸에 힘이 들어갔고, 술기운도 단번에 달아났다.

“백마!”

짧고 또렷한 외침.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지만, 경례는 흔들림 없이 정확했다.

차 안으로 스며든 술 냄새가 콧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두칠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였다.

그가 짧게 말했다.

“타게.”

장춘동은 조수석 문을 열고 허리를 낮춰, 고개를 숙인 채 탔다.

짚차는 말없이 기어를 넣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대장 관사 응접실.

은은한 조명이 낮게 깔려 있었다.

전두칠은 말없이 장춘동에게 잔을 내밀었다.

투명한 크리스탈 글라스에 금빛 양주가 찰랑댔다.

“한 잔 하게.”

전두칠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속엔 철판처럼 단단하고 칼날 같은 냉기가 엷게 서려 있었다.

장춘동은 잔을 받으며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단숨에 털어넣었다.


전두칠은 말없이 잔을 돌렸다.

탁자 위에서 유리가 서걱거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무슨 일 있나, 장 하사?”

짧고 질문 한마디에 장춘동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연대장님… 작전 중 민간인 접촉이 조금 문제가 됐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억울함’을 털어놨다.

“저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장 중위님께서 저를 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처음엔 마른 기침처럼 삐걱대던 목소리에 점점 감정이 실렸고 말끝엔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장춘동의 말을 다 듣고난 전두칠은 천천히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엔 연민도, 공감도 없었다.

그는 이미 장기동 중위에게서 모든 사실을 보고받고 있었다.

민간인 폭행, 무차별 난동, 공포와 탐욕, 오만과 폭력.

하나도 빠짐없이….

하지만 그는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허허, 그랬겠구만. 장 중위가 좀 까다롭지.”

짧고 가벼운 위로.

그러나 그 말 한마디에—장춘동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연병장에서 본 무지개가 눈 앞에 떠올랐다.

장춘동은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연대장님!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전두칠은 잔을 돌리던 손을 멈추고 그를 내려다봤다.

유리잔 표면에 맺힌 빛이 흐트러졌다.

“흠…”

그의 입꼬리가 살짝, 아주 미세하게 천천히 올라갔다.

“장 하사! 내가 이 자리에 오르고 보니 알겠더군.”

탁!

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양지에서 일하는 부하도 필요하지만, 음지에서 나를 지켜줄 놈도 있어야 해.”

장춘동의 귀가 확 열리고 눈빛이 뜨거워졌다.

가슴속에 숨어 있던 야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자네는… 그림자처럼 움직일 수 있겠나? 내 혀처럼 거짓을 말하고, 내 손처럼 피를 묻힐 수 있겠나?”

잠시 정적.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그건 생각할 시간이 아니라, 그 말을 삼키는 시간이었다.


전두칠은 잔을 들어 남은 술을 털어넣고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필요하다면, 내 죄까지 대신 뒤집어쓸 수 있겠나?”

그 순간, 장춘동은 두 주먹을 바닥에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넵. 언제든, 무슨 명령이든 따르겠습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비뚤어진 충성심과 굶주린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술기운으로 달궈진 관사의 응접실.

장춘동은 벌써부터 목줄 없는 사냥개처럼 주인의 앞을 막는 것들은 뭐든지 물어뜯고, 권력의 그림자 속에서 감히 넘볼 수 없었던 것들을 마음껏 누리는 상상을 했다.

손에 피가 묻고, 몸에서 피를 쏟는 건 당연한 대가이자 훈장이라고 여기면서….

그날 밤,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남국의 한 군부대에서 ‘레인보우 키퍼’라는 이름의 악마가 태어났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긴박했던 4월이 지나고, 어김없이 5월이 찾아왔다.

하늘은 투명할 만큼 맑았고, 그 아래서 규는 묵묵히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땀에 젖은 전투복, 굳은살이 박힌 손.

그리고—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기억들.


‘더, 더 많이 기억해야 한다.’

53년 전의 그는 무지했고, 순진했다.

그 무지가,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싸울 수 있다. 이번엔 꼭… 뚜엣을 살릴 거야.’

그의 눈빛엔 단단한 각오가 응축돼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자신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 힘에 가로막혔다.

53년 전으로 돌아온 첫날.

그는 분명, 방아쇠를 당겼다.

온몸의 분노와 53년의 세월을 실어 다시 만난 악마의 심장을 겨눴다.

하지만… 방아쇠는 움직이지 않았다.

린도 마찬가지였다.

규의 기억 속 그녀는 장춘동에게 짓밟히고, 무너지고, 끝내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엔—달랐다.

리차드가 개입해 그녀를 지옥에서 꺼냈다.

그 결과 린은 살아남았다.


‘왜?’

‘어째서?’

53년 만에 돌아온 세계는 그대로였다.

사람도, 햇빛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하지만—결과가 달랐다.

누군가가 처음부터 설계를 고쳐 놓은 것 같았다.

운명이, 조용히 틀어지고 있었다.

그 변화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존재했다.


규는 분명하게 느꼈다.

이제 그는 단지 기억하는 자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다.

어쩌면—그는 지금,

기억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진짜 게임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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