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16일 · 서울시 중구 예장동>
어둠에 잠긴 종로의 골목길.
빗방울은 그쳤지만, 아스팔트 위엔 여전히 습기가 흥건히 배어 있었다.
한 사내가 길모퉁이를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정장 상의는 구겨졌고, 넥타이는 헐겁게 풀린 채였다.
그는 희끄무레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잠시 멈춰 섰다.
‘꽃’이라는 작은 글자가 새겨진 돌판을 힐끗 바라본 뒤, 코끝으로 끌어올린 신음 한 줄기를 짧게 내뱉고는,
다시 골목 어귀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시각, 남산 기슭.
구 정보국 청사의 지하 3층.
창 하나 없는 콘크리트 공간,
스크린 아홉 개가 푸른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옐로우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피로가 뼛속까지 스며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깨어 있었다.
손가락은 굳었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겁게 내려앉았다.
책상 위 커피는 오래 전에 식었고, 재떨이는 넘쳐났다.
그는 방금 막 수신한 암호문을 받아 들었다.
발신자는—장춘동.
[첩보 수집 지시 : 신원 미상 여성 ‘낸시’(Nancy).
목적 : 배후 조사 및 보고.]
“...젠장.”
말보다 먼저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입술을 비틀며 암호문을 내려다보던 옐로우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켜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자 뒤나 캐라 이거지… 하, 내가 무슨 심부름센터냐?”
불이 붙자마자 입술 사이로 깊은 한 모금이 빨려 들어갔다.
곧이어 천천히 내뱉은 연기가, 한숨처럼 천장을 향해 피어올랐다.
담배연기보다 더 짙은 피로감과 자괴감이 방 안을 뒤덮었다.
하지만—장춘동.
그 이름을 떠올리자, 옐로우는 온몸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피곤이고, 분노고, 다 집어치워야 했다.
그 이름은 거부할 수 없는 경고였다.
‘말 안 들으면 진짜로 죽는다.’
옐로우는 이를 악물고 모니터 화면을 노려봤다.
민간 위장망 너머, 외교부 협조로 관리되는 ‘FIS-외국인 출입자 보안망’에 비밀리에 접속한 상태였다.
보안망을 뚫고 나서야, ‘낸시’라는 여자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적 : 영국.
출생지 : 런던.
부 : 윌리엄 하워드 - 영국·필리핀계 유통업자.
모 : 마리아 코르테스 - 필리핀 출신, 이민자 2세.
서울 외국인학교 졸업. 영어, 한국어 능통. 국제통상학 전공.
사진도 있었다.
깔끔했다. 너무나….
서류, 출입국기록, 의료보험 이력, 학적.
그 어디에서도, 단 하나의 흠집도 찾을 수 없었다.
옐로우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씰룩였다.
“… 재수 없을 만큼 깨끗하군.”
이건 그냥 완벽한 신분 세탁이었다.
국정원에서 반평생을 굴러온 옐로우는 단번에 알아챘다.
이건 조작된 신분이다. 아주 고급스럽게, 아주 공들여 만든.
누가 만들어 줬는지는 몰라도, 자잘한 외교 경로까지 정교하게 엮어둔 솜씨였다.
그녀는 단순한 정보 브로커가 아니었다.
목숨값이 더 나가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인물이었다.
‘정보를 파는 몸뚱이에 왜 이 정도 정성을 쏟지?’
옐로우가 아는 한, 그 답은 하나였다.
‘낸시’는, 누군가의 자산이었다. 그것도 매우 귀하게 다뤄지는.
그리고 옐로우는 알았다. 지금 이걸 장춘동에게 그대로 올리면—
그 미친놈은 분명 그녀를 없애버릴 거라는 걸….
그는 조용히, 딱 한 줄짜리 보고서를 올렸다.
[‘낸시’ 문제 없음. 신분 깨끗함.]
‘건들지 마, 새끼야.’
속으로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겉으로는 언제나처럼 복종의 형식을 취했다.
지금은 움직일 때가 아니었다.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무는 손끝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러나—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장춘동이 보낸 지시서 아래,
두 번째 항목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
[린이라는 여자의 1972년 기록.
닌호아 하이난 거리 립스틱클럽 근무.
생존 여부, 현재 행방 포함.]
“… 이 미친 놈은 진짜!”
옐로우의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정신이 멀쩡하긴 한 건가?
53년 전, 그것도 전쟁터였던 베트남 현지 클럽 종업원을 지금 찾으라고?
“죽겠다, 진짜…”
한동안 책상에 이마를 박은 그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긴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지…”
그리고 마우스를 움켜쥐었다.
피로와 광기가 뒤섞인 눈빛으로, 옛날 군사기록 열람 시스템의 암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남산 지하 깊은 곳에서, 잊힌 지 오래된 한 이름이 조용히 떠올랐다.
린!
이제, 53년 전의 과거가 현재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딱, 딱—
옐로우의 손끝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텅 빈 지하 공간에 메아리쳤다.
그는 커피 대신 씹던 니코틴 껌을 입 안에 구겨 넣고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된 서버, 비밀번호가 풀린 암호 보관소.
그는 1972년의 자료를 뒤졌다.
국방부, CIA, 베트남 정부 협약 문서, 미군 정보부 옛 문건들까지….
모든 분류표, 모든 코드, 모든 사본을 샅샅이 훑으며 그 이름을 찾았다.
린!
그 이름은 흔했다.
하지만 그와 연결된 특정 키워드—립스틱클럽, 미군 체포, 실종—을 묶는 순간, 하나의 파일이 반짝이며 떠올랐다.
인물명 : 린 (Linh)
1972년, 베트남 닌호아 하이난 거리 소재 립스틱클럽에서 체포.
미군 정보부에 일시 구금되었으나 1주일 후 석방.
석방 이후, 인근 찻집에서 서빙 일 시작.
1973년, 미군 철수 직전 실종.
최종 목격자 증언 : ‘반 뜨엉’과 동행. 이후 두 사람 모두 전투 중 사망 추정.
“… 반 뜨엉?”
옐로우는 낯선 이름을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검색창에 이름을 입력했다.
소수 민족 출신, 베트콩 소속.
첩보 보고에 따르면, 심리전과 유인전 특히 저격에 능한 정예요원.
그러나 미군과의 교전 중 탈영. 이후 행방불명.
첩보 기록엔 ‘극단적 개인주의자. 생존 가능성 낮음.’이라는 평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마지막으로 목격된 인물, 린!
옐로우는 눈썹을 찌푸렸다.
“둘이 사라졌고, 둘 다 죽었다고?”
그는 화면을 스크롤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정도면 됐어. 이 미친 놈이 흥미만 끌면 됐지.”
그러면서 옐로우는 추가 조사는 하지 않았다.
민주와의 교전이 이미 전면전으로 번지고 있었고,
이딴 옛날 여자 하나에 더 쓸 에너지는 없었다.
그는 대충 정리된 보고서를 장춘동에게 전송했다.
[린: 실종 및 사망.
베트콩 요원 반 뜨엉과 동행.
최종 생존 확인 불가.]
파일을 보낸 뒤, 그는 의자에 몸을 던지듯 기대어 눈을 감았다.
한 줄기 긴 한숨이 천장을 향해 흘렀다.
“됐어. 이걸로 끝이다.”
같은 시각, 장춘동의 안가.
‘삑~’
스마트패드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장춘동은 조용히 화면을 켰다.
전송자는 옐로우.
화면 속에는 린의 신상, 그리고 반 뜨엉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반 뜨엉…”
그는 천천히, 그 이름을 읊조렸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다시 살아나는 듯한 감각.
그는 왼손을 들어, 왼쪽 귀 아래를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오목한 흉터.
아주 오래 전—끼엠 마을에서 자신의 귀를 날린 그 남자,
그가 바로 반 뜨엉이었다.
눈가가 실룩이고, 입꼬리가 찢어질 듯 일그러졌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린이 죽었다고…? 반 뜨엉이 데리고 갔고…?”
허공을 향해 말하듯 중얼거렸지만, 그 음성은 서늘하고 또렷했다.
그는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웃음이 아니었다.
자신이 지워야 했던 마지막 조각이 사라졌다는 안도, 그리고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거란 기묘한 평온.
그 모든 감정이 뒤섞인, 잔인하고도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그래… 이번엔 확실히, 다 지워버리자.”
장춘동은 천천히 돌아섰다.
방 안에 켜져 있던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의 눈빛에는 53년 전, 귀가 날아가 피를 토하던 그때의 살기가 고스란히 살아났다.
서울의 새벽은 고요했다.
기상청은 ‘안개’라고 말했다.
그러나 누구도 몰랐다.
그 안개가 사실은—
피의 사냥, 그 전조를 알리는 붉은 안개였다는 것을….
* * *
며칠 후 새벽 2시.
영업이 끝난 ‘꽃’은 다시 어둠 속으로 숨었다.
고요한 대청마루 뒤, 배주란의 사무실엔 불이 꺼지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양주 한 병과 크리스탈 잔 두 개가 반쯤 채워져 있었다.
부드러운 조명이 배주란과 엘린—아니, ‘낸시’의 얼굴을 감쌌다.
배주란이 먼저 잔을 기울였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진한 술기운에, 그녀의 어깨가 살짝 풀렸다.
“낸시.”
“네, 사장님.”
배주란이 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 일 해요? 경력 보니까 꽤 화려하던데.”
엘린은 한박자 쉬었다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어요. 집도 다 정리하고, 뭐라도 해야 했죠. 사람 상대는 익숙하니까… 이쪽이 빠르겠더라고요.”
“그래요? 그래도 이 바닥 처음치고는 아주 잘 하던데.”
배주란의 말투는 흐뭇했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엘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었어요. 사장님은… 언제부터 이 일을 하신 거예요?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사장님 팬이었거든요. 그 시절, 최고였잖아요. 연예계에서 갑자기 사라지셔서… 여기서 뵐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잔을 기울이던 배주란의 손이, 아주 잠시 멈췄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대며, 천장을 바라봤다.
“… 55살. 내 나이 말한 적 있던가? 딱 10년 전까진, 그래. 모든 게 내 발밑에 있었지.”
그녀의 말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소속사 대표가 부른 자리였어. 별 생각 없이 갔지.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처음 만났어. 장춘동.”
배주란이 그 이름을 내뱉는 순간, 엘린은 시선을 떨궜다.
“그 인간, 이미 내 약점 다 쥐고 있었더라고. 프로포폴, 젊은 배우랑… 그런 거, 우리 부모도 그때 사기 터졌고.”
배주란은 반쯤 남은 잔을 한 번에 털어넣었다.
“나? 저항 한 번 못 했지. 그 술엔 뭐가 들어 있었고… 그날 이후 나는—그 사람의 장식품이었어.”
엘린이 배주란의 잔을 채워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힘드셨겠어요.”
“지옥이야.”
배주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좋아하던 노래 있거든? ‘꽃이 피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면 잎이 진다’… 예쁘게 피어나면 뭐해. 결국은 다 떨어지더라고. 딱, 그 짝이지.”
순간,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말야… 요즘엔 좀 달라. 한동안 안 오던 손님이 한 분 있는데… 진짜 ‘신사’라는 게 뭔지 알겠더라.”
배주란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어쩌면 나도… 늙은 게 아닌지도 몰라. 그 사람 앞에선 그냥… 그냥… 소녀가 되더라.”
엘린은 눈웃음을 지었다.
“사장님, 예쁘세요. 지금도요…”
“쳇! 빈말이라도 기분 좋네.”
배주란이 픽 웃었다.
잔을 털어넣고는, 두 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치며 말했다.
“앞으로 둘이 있을 땐… 그냥… 언니라고 불러.”
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 소파에 몸을 던지듯 기댔다.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
입꼬리는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마치, 그 모든 고통의 시간을 잊은 듯.
엘린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곁에 앉아 등을 살짝 토닥였다.
그리고 속삭였다.
“네… 언니.”
배주란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속삭였다.
“근데 말야… 낸시. 사람은 누구나 무너지는 때가 있어. 난 그게… 너무 길었을 뿐이야.”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낸시는 문득 생각했다.
오래 전 무너졌던 배주란은—
지금 누군가를 무너뜨리려는 건 아닐까?
퍼플, 옐로우, 인디고…
레인보우 키퍼는 이미,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