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아! 김 일병

<1972년 5월 · 베트남 닌호아 백마부대>

by 부지깽이

53년 전, 박규는 이 땅에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떠났다.

뚜엣은 죽었고, 린은 사라졌고, 장춘동은 살아서 귀국선을 탔다.

53년 만에 돌아온 이 곳은 자신의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도, 날씨도, 전장의 냄새까지도—모두 그때와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린은 구출돼 안전한 곳에 정착했고, 장춘동의 심장을 겨누고 당긴 방아쇠는 끝내 당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뚜엣이 죽는 비극의 밤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박규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단순히 기억 속을 헤매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을 바꾸고, 운명을 다시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요즘—

부대 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작년 12월, 미군이 철수를 시작했고 그 여파는 한국군에도 서서히 번져 왔다.

철수.

그 말은 소문과 추측, 기대와 불안을 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회자되었다.

“야, 들었냐? 우리 7월이면 철수란다.”

“아냐, 8월이래.”

“그래도 가긴 가는 거지? 씨발, 여기서 뒈질 줄 알았더니!”

외출을 다녀온 병사들은 하이난 거리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물 위에 기름을 붓듯 퍼뜨렸다.

말은 가볍고 떠들썩했지만, 그 속엔 모두가 바라마지않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규는 달랐다.

그는 속이 타들어갔다.

햇볕과 땀 때문이 아니라, 기억 때문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그러면 끼엠마을 학살은 일어나지 않아.’

‘뚜엣도, 마을 사람들도 죽지 않아…’

그는 새벽마다, 밤마다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한 번도 믿어본 적 없던 신에게도 매달렸다.

‘부디… 제발… 한 달만 앞당겨줘…’


그러나—

현실은 또 한 번, 그를 무자비하게 걷어찼다.

그날—규의 기억 속에 없던 날.

하늘이 뒤집혔다.

장맛비가 쏟아졌다.

쉴 새 없이 내리꽂히는 빗줄기 속에서, 끼엠마을 인근 진지가 붕괴됐다.

천둥은 대지를 찢을 것처럼 울었고, 비바람은 축축한 공기를 뒤흔들었다.

몇 시간 만에, 진지가 있던 곳은 진흙더미가 됐다.

그리고 비가 멎자마자—명령이 떨어졌다.

“4분대, 진지 보수 출동!”

규는 삽을 들고 김 병장, 함 상병, 김 일병과 함께 진지 복구 작업에 나섰다.

아침 해가 뜨기도 전부터 그들은 흙더미 위로 몸을 던졌다.

삽질.

마대자루에 흙 담기.

다시 쌓기.

끝도 없는 반복.

점심도 되기 전에 러닝셔츠는 땀에 흠뻑 젖었고, 온 몸에 땀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하아… 정말… 존나게 덥네.”

김 병장이 잠시 삽질을 멈추고, 삽자루에 턱을 괸 채 투덜댔다.

“이 놈의 더위가 사람 잡겠네!”

함 상병은 삽을 질질 끌며 힘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젠장! 허리 끊어지겠다….”

규도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들 기진맥진했고, 누구 하나 웃지 않았다.

그래도 버텨야 했다.

버티는 것 말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점심-그리고 짧은 휴식.

오후의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렸고, 땅바닥은 달궈진 솥뚜껑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폐를 긁었다.

비오듯 흐르는 땀은 멈출 줄 몰랐고, 아침에 이미 축축해진 옷은 마를 틈조차 없었다.

그 땀과 흙과 피로 속에서—

아무도 몰랐다. 규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이 시간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는지.

“아따 더워 디지겄네잉… 빤쓰까지 흠뻑 젖어부렀당께!”

떠벌이 김 일병이 삽을 집어던지고, 진지 위에 올라가서 팔을 선풍기처럼 휘휘 저었다.

김 일병의 행동에 다른 병사들은 피식거리며 웃었지만, 규는 웃지 못했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규의 가슴 속에 불길한 먹구름을 몰고 왔다.

“형수님~ 뚜엣 형수니이이임~~~!”

김 일병이 두 손으로 마이크를 만들어 끼엠마을을 향해 소리쳤다.

그 순간—

규의 몸이 저절로 굳었다.

‘… 형수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튀어 올랐다.

총소리.

그리고 피.

규의 입에서 마른 숨이 새어 나왔다.

‘아니야… 아직 6월도 안 됐는데… 설마… 아닐 거야… 아직은—’


그 순간—

탕!

한 발. 딱 한 발. 그 한 방에—

김 일병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몸을 뒤로 꺾었다.

가슴을 움켜쥔 채, 진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김 일병!!”

규가 절규했다.

모두 삽과 마대자루를 내던지고, 김 일병에게 달려갔다.

진지에서 굴러떨어진 김 일병의 가슴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김 병장은 비명을 삼켰고, 함 상병은 손을 뻗다 말고 뒷걸음질쳤다.

김 일병는 눈도 감지 못했고, 생기 가득하던 눈동자는 이미 빛을 잃은 후였다.

김 일병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도, 규는 진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김 일병이 삽질하던 진지는 흙먼지와 피 냄새로 가득했다.

규는 생각했다.

‘다르다고 믿었다. 이번엔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미래를 아는 내가, 그 무지했던 과거의 나보다 나았으니까.’

하지만 총성 한 발이, 그 믿음을 산산이 깨뜨렸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린이 살아남은 건, 원래 죽을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뚜엣은?

그녀는, 과연 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까?

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되뇌었다.

“잊지 마! 네가 왜 여기에 돌아왔는지를.”


* * *


부대는 곧장 비상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대낮에, 그것도 진지 한복판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저격이라니—

누구도 안심할 수 없었다.

중대장 장기동 중위는 장춘동 하사에게 조사를 맡겼다.

공교롭게도, 김 일병이 총에 맞던 시각에 장춘동은 끼엠마을에서 순찰 중이었다.


사건조사를 맡은 장춘동은 김 일병이 저격당한 진지 근처를 수색했다.

그러던 중, 진지 뒤편 둔덕에서 탄환 하나를 발견했다.

러시아제 모신나강.

베트콩 저격수들이 즐겨 쓰는 소총의 것이었다.

그 탄환은 김 일병의 심장을 뚫고 진지 뒤편에 박힌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외부 공격’의 증거였다.

장춘동은 곧바로 부하 몇 명을 이끌고 끼엠마을로 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그리고 진지와 가장 가까운 마을 끝 숲속에서 모신나강 탄피 하나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장춘동은 ‘베트콩 저격수가 마을 근처에서 기습 공격을 한 것’으로 보고서를 썼고 사건은 그걸로 일단락됐다.

그리고—

그걸 빌미 삼아, 장춘동은 끼엠마을로 들어와 또다시 행패를 부렸다.

“니들이 베트콩을 숨겨 줬잖아! 이 탄피가 그 증거다, 이 새끼들아!”

주민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공포는 익숙했고, 침묵은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 시각.

경계근무 교대 중 잠시 짬을 낸 규는 뚜엣을 찾아갔다.

“김 일병이… 죽었어.”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고, 온 몸을 떨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규는 가만히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규는 촌장과 마주쳤다.

촌장은 주름진 눈으로 규를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툭— 던졌다.

그 총소리 나고 얼마 안 돼서… 장춘동이 마을 끝 빈집에서 나오는 걸 봤소. 거긴 예전에 반 뜨엉이 살던 집이었는데….”

“반 뜨엉요?

규가 묻자 촌장은 뜨엉이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린에게 구애했다 거절당한 뒤, 베트콩에 합류한 청년이라고 설명해 줬다.

규는 촌장이 알려준 빈집으로 향했다.

설마? 하는 마음과 어쩌면? 하는 예감이 동시에 규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빈집에 들어가 살펴보니 창가 쪽 바닥에 누군가 누워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진짜… 장춘동이…?”

의심은 곧 확신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증거가 없었다.

탄피는 이미—장춘동이 ‘다른 장소에서 발견했다’며 제출해버린 뒤였다.


며칠 뒤, 비번날 규는 뚜엣과 함께 린을 찾아갔다.

린은 커피잔을 닦던 손을 멈춘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녀는 규와 뚜엣의 얼굴을 보고 이미,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린…”

뚜엣이 조심스레 다가가 말했다.

“김 일병님이… 죽었어.”

그 순간, 린의 손에서 커피잔이 떨어졌다.

바닥에 유리 파편이 튀었고, 린은 숨을 삼킨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린은 비틀거리며 가까운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하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뚜엣이 조심스레 다가갔다.

린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 사람… 나한테 늘 먼저 다가왔는데…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보냈어…”

린은 뚜엣에게 안겨 어깨를 들썩이며 속깊은 울음을 토해냈다.

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감았다.

린은 한참 뒤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물로 젖은 얼굴에, 또렷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 사람… 왜,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 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다.”

그녀는 규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규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폭우로 무너진 진지 보수작업 중이었어. 진지에 올라갔다가 총에 맞았지.”

규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마을 쪽에서 총성이 났고 장춘동이 조사를 맡았어. 그가 발표한 내용은…”

규는 말을 잇다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

컵을 쥐고 있는 린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반 뜨엉, 끼엠마을 출신 베트콩 저격수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린이 소리쳤다.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또렷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엔 얼음처럼 맺힌 절망이 떠올랐다.

“뜨엉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가 날 좋아했던 건 맞아요.

하지만, 난 거절했고—”

그녀는 숨을 삼켰다. 그 기억을 꺼내는 일은 늘 힘들었다.


“그 후에도… 그는 단 한 번도 날 해치려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마을에서 누구에게도 위협적인 행동을 한 적 없었어요. 전투 중이 아닌 사람을 죽일 사람… 아니에요, 그는.”

그 말이 끝났을 때, 규는 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규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거의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말했다.

“…역시… 장춘동이 쐈나?”

규의 혼잣말이었지만 규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린에겐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린의 눈이 부릅떠지고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쿵!

린이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옆에 앉아있던 뚜엣이 잡을 새도 없이.

그 순간—

어디선가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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