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20일 · 사설감옥 ‘칠흑’>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요정 ‘꽃’의 새끼마담이었다.
마담 배주란의 감시자였고, 장춘동의 첩자였다.
차가운 술잔을 들고 뜨거운 밤을 날아다니던 ‘요정’이었다.
그런 밤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꿈은 깨졌고, 무대는 사라졌다.
새벽 공기는 싸늘했다.
온몸에 한기를 품은 돌벽, 물비린내 섞인 먼지, 그리고 바닥에 깔린 곰팡이 냄새까지—
이곳이 어디인지, 그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햇빛도, 시간도 사라진 장소라는 것.
그녀는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하루 전인지, 일주일 전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단 하나 확실한 건—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변정숙.
1975년생. 서울 관악구 신림동 출신.
키 165cm. 늘씬한 몸매에 관능적인 실루엣.
뽀얀 피부에 커다란 눈동자.
흔히들 “예쁘다”라고 부르던 얼굴.
하지만 언제나 따라붙던 말은, “좀 헤퍼 보여.”
그건 마치 그녀의 인생에 붙은 주석처럼 따라다녔다.
단아한 배주란, 모두가 칭송하는 그녀의 ‘고전미’와는 정반대의 이미지.
그리고 그녀를 찢어놓은 그 이름—배.주.란.
정숙은 90년대 말, 드라마와 영화 속 단역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잠깐이었지만, 배주란을 괴롭히는 악역으로 이름을 알렸다.
카메라 앞에서 불타는 질투를 연기했지만, 카메라 밖에서도 그 질투는… 진짜였다.
“주연은 무게가 있어야 돼.”
“넌 싸 보여서 안 돼.”
그 말들이 칼처럼 박혔다.
그녀는 웃었지만, 그 안엔 씻을 수 없는 울분이 고여 있었다.
배주란이 싫었다.
아니, 지독히 미웠다.
연기도, 얼굴도, 사람도….
왜 다 그 여자 편인가.
왜 그 여자만 빛을 받는가.
그래서 정숙은 속으로 맹세했다.
‘언젠가 그 년을 무릎 꿇게 하겠다.’
그러던 어느 날, 장춘동을 만났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찾아온, 늙고 썩은 손길이었지만—기회였다.
그는 그녀의 야망을 간파했고, 그녀는 그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꽃’의 새끼마담.
겉으론 배주란의 오른팔,
속으론 배주란의 감시자.
10년 동안 정숙은 지켜봤다.
배주란의 하루하루.
그녀의 상처, 취기, 한숨, 그리고 가끔 보이는 따뜻함.
그것이… 흔들리게 했다.
“나도 언니처럼 되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날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그녀는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냐, 그래도 난 주인공이 돼야 해.”
배신은 그렇게 다시 선택되었다.
그날, 결정적인 제보를 하러 장춘동에게 향하던 그 길.
어디선가 검은 손이 그녀를 덮쳤다.
눈앞이 깜깜해졌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이 방에 갇혀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없었다.
단 하나, 가끔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만이 이곳이 꿈 속이 아니란 걸 말해주고 있었다.
“…배주란.”
정숙은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메마르고,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네 자리를 빼앗고 싶었던 거야. 근데… 내가,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울 수 없었다.
이곳에선 울어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복수심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갈수록 커지는 공포가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맨살을 핥고 있었다.
이곳이 어딘지 모른다.
누가 감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지금,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는 것.
이 시간, 엘린은 배주란의 곁에 있었고,
그녀는 칠흑이라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엔—
복수와 공포가 나란히 깃들어 있었다.
* * *
‘꽃’의 대문 앞, 붉은 초롱이 비에 젖어 조용히 흔들렸다.
서울의 어둠은 깊었고, 그 속에서 권력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밤 ‘꽃’을 꺾으러 온 손님—
장민구. 새희망국민당 소속, 서울 종로구 재선 국회의원.
차기 대권을 노리는 실세.
말끔한 정장, 단정한 미소.
장민구는 언론이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인권 변호사 출신’ 보수 정치인.
이질감 있는 두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 있는 듯 보였다.
정치 입문 후에도 꾸준히 해 온 고아원 봉사활동 사진이 K-일보에 실렸다.
그가 그 고아원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중적 인기가 급등했다.
‘자수성가’, ‘서민의 희망’, ‘이 시대의 개혁가’.
언론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그 고아원은 처음부터 깨끗한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장춘동이 ‘레인보우 키퍼’ 활동 초기에 자금세탁과 인맥 관리를 위해 세운 위장 시설이었다.
입양 대신 후원을 택한 이유는 하나.
머리 좋고 독기 있는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해서였다.
몇몇은 대학으로, 몇몇은 군대로, 또 몇몇은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결과물들 중 가장 성공작—
그가 바로 장민구였다.
그는 장춘동이 직접 발굴해 정치권으로 내보낸 첫 번째 인형이었다.
지금도 그의 곁에는 그 고아원 출신들이 보좌진, 운전기사, 그리고 ‘연결선’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오늘 그를 불러낸 이는, 바로 그의 ‘어르신’—장춘동.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장민구는 조심스럽고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장춘동 앞에서는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종로 잘 지키고 있냐?”
장춘동은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동네, 내가 40년 넘게 조용히 관리해 온 데야. 골목 하나도 허투루 쓰지 마.”
“예, 어르신. 그 동네 담장 높이도, 벽돌 색깔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그 속엔 과거를 의식하고, 기회를 엿보는 야심이 겹쳐 있었다.
술자리는 이미 세팅돼 있었다.
상석엔 장춘동이 앉았고, 그 옆엔 낸시가 앉아 조용히 술을 따랐다.
장춘동 맞은편엔 장민구가, 그의 옆엔 배주란이 앉았다.
잔이 돌기 시작했다.
배주란이 몸을 살짝 기울이며 장민구에게 잔을 내밀었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잔잔하게 퍼졌다.
그녀의 손끝이 잔을 건네는 척하며 그의 손등을 스쳤다.
“의원님, 오늘은 좀 취하셔도 괜찮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임처럼 부드러웠다.
장민구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사실… 이렇게 말씀드리긴 민망한데요.”
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학창시절 친구놈 책받침 훔쳐보다가, 처음으로 연예인을 좋아하게 됐던 게…
배 사장님이었습니다. 하하”
배주란은 미묘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억지 웃음도, 유혹도 없는 표정. 하지만 속으론—
‘이 남자도 나를 갖고 싶어 하는구나’하는 익숙하면서 불쾌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장민구는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때 저는 책받침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책받침 속 주인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뵐 수 있다는 게… 좀 묘하네요. 하하하”
그의 웃음엔 지난날의 허기와 현재의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배 사장님은 지금도 여전하시네요.”
장민구가 덧붙였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으세요.”
그 말에 배주란은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은 숱한 욕망과 질투의 시선을 견디며 살아남은 여자의 노련한 미소였다.
“어르신, 요즘은 어디서 주무십니까? 종로에서 지내십니까?”
장민구가 물었다.
겉으론 예의를 갖춘 듯했지만, 그 질문은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다.
장춘동은 집을 한 곳에 두지 않았다.
공식적인 주소는 종로지만, 강남의 타운하우스, 평창동의 별장, 경기도 외곽의 고급 빌라, 심지어 도심 속에 숨겨둔 은신처까지—
거처는 상황에 따라 바뀌었고, 그 중 일부는 오직 장민구처럼 오래된 자들만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사라지고, 또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질문에 장춘동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그 집은 내가 너 장학금 주던 시절에도 쓰던 데야. 그때만 해도 넌 빵 한 조각도 배불리 못 먹었지? ”
“예, 기억납니다. 그 빵도 어르신 덕에 먹었죠.”
장민구는 술기운에 기대는 척하며, 그러나 속으론 계산된 정중함으로 잔을 비웠다.
“집안은 평안하고?”
장춘동이 물었다.
“예. 아내는 국립대 음대 교수입니다. 제가 밖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도, 집안에선… 뭐, 조용하게 정리되는 사람입니다.”
‘정리된다’는 말에 배주란이 눈길을 멈췄다.
그 속뜻을 단박에 읽은 눈빛이었다.
“정리… 잘 되는 가정, 그게 제일 부럽죠.”
말은 던졌지만, 감정은 없었다.
그녀는 그가 던진 유혹에 반응하되, 그 유혹에 휘둘리진 않았다.
리액션은 있었지만,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들은 서울법대 다니다가, 올해 초 해병대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장민구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는 고아라 병역 면제고… 그래서 아들놈이 제 몫까지 하게 했죠”
군대, 그것도 해병대 자원입대.
자신의 선거를 위한 포석이라는 걸 그녀는 단번에 알아챘다.
“민구야.”
장춘동이 잔을 들며 말했다.
“넌 잘하고 있다. 내가 심은 것 중에… 가장 잘 자란 놈이다.”
그 말에, 장민구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다 어르신 덕분입니다.”
익숙한 말, 수없이 되뇌어온 충성의 문장.
하지만 이번엔 어딘가 달랐다.
고개를 숙인 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가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의 변화를 배주란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방금 본 저 표정이 무얼 말하는 걸까.
대통령 자리에 가까워졌다는 만족감인가, 아니면 자신을 키워준 이를 삼킬 때가 왔다는 맹수의 본능인가.
그 답은—오늘 밤,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장춘동이 낸시의 부축을 받으며 먼저 떠난 뒤, 메인홀엔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테이블은 깨끗하게 치워졌고, 조명은 한 톤 낮아졌다.
“한 잔… 더 하실래요?”
배주란이 조용히 물었다.
미소는 부드러웠고, 눈빛엔 묘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장민구는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콜이죠.”
‘꽃’ 내부 깊은 곳.
회원들조차 존재를 모르는 룸.
천장은 낮고, 조명은 희미했으며, 백자 향과 스코틀랜드 위스키 향이 은근히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이 방 안에 들어서자, 문이 ‘탁’ 하고 닫혔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 사이엔 말 없는 정적이 흘렀고, 그녀가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그의 잔, 그리고 자신의 잔.
“요즘… 의원님 얼굴, TV에서 하루도 안 빠지더군요.”
배주란이 잔을 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주변에서 다들 그러던데요.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장민구는 웃으며 잔을 살짝 기울였다.
“과찬입니다. 언론이 좋게 봐주는 거죠. 어르신께서 뒤에서 많이 도와주시니까요.”
그의 말은 겸손했지만, 시선은 조용히 흐려지고 있었다.
잔 사이로 그녀의 손끝을 훑고, 가끔 가슴팍을 힐끗 스쳤다.
배주란은 모른 척했다.
“의원님께, 어르신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녀가 물었다.
장민구는 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부모님 같은 분이죠. 저를 이 자리에 앉혀주신 분. 정치가 뭔지도 몰랐던 고아 하나를 길러서 여기까지 끌어올리신 분이니까요.”
그는 말을 멈췄다가, 한숨처럼 낮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가끔 무섭기도 합니다. 어릴 땐 도망치고 싶었던 적도 많았고… 한 번은 실제로 도망쳤다가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 맞았어요. 요즘도 가끔 그 꿈을 꿔요.”
그 말을 듣고 배주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도… 언젠가는 장춘동을 물어뜯을 사람이겠구나.’
그녀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분명하게 일어났다.
그녀는 잔을 들고 일어나 조용히 장민구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그에게 어깨를 기대고 손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전 이 방이, 대통령이 될 분의 것이 됐으면 해요. 이 방 안의 모든 것 정보, 흔적… 그리고, 사람도요.”
그 말에 장민구의 눈빛이 풀어졌다.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엔 감출 수 없는 본능과 숨길수록 드러나는 야망이 겹쳐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삑—’
노이즈 캔슬링 장치가 작동하며, 벽 너머의 모든 귀를 닫았다.
“여긴 이제 아무도 엿들을 수 없어요. 우리 둘밖에 없죠.”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친 순간 불꽃이 튀었다.
숨결은 뜨겁게 뒤섞였고, 탐색은 탐닉으로 바뀌었다.
룸 안엔 비밀이 내려앉았고, 탐욕과 야망이 뒤엉켜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정체를 끝내 알지 못했다.
장민구가 ‘블루’였다는 걸.
배주란이 ‘인디고’였다는 걸.
그리고 둘은—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장춘동이 설계한 판이라는 걸.
“서로를 찌르기 전, 먼저 끌어안게 하라. 칼은 더 깊이 박히니까.”
천장에서, 악마가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