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9월 말 · 닌호아 끼엠마을>
계절이 바뀌는 길목, 베트남의 열대우림은 우기와 건기 사이, 그 위태로운 경계에 서 있었다.
하늘은 희뿌옇게 잠겨 무거웠고, 공기에는 빗물 머금은 흙냄새, 눅진하게 썩은 나뭇잎 향, 그리고 축축하게 달아오른 숨결이 뒤엉켰다.
낮은 뙤약볕이 정수리를 쪼아댔고, 해질녘엔 짧지만 맹렬한 스콜이 붉은 노을 속으로 미친 듯 쏟아졌다.
논은 반쯤 물에 잠긴 채, 물소들의 둥근 등 위로 해가 기우는 풍경은 기이할 만큼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 고요한 풍경 속으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창열 병장과 함돈혁 상병은 7월에 무사히 귀국했다.
죽지 않고 살아 돌아간, 운 좋은 병사들.
박규 역시 같은 달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남았다.
복무 기간을 6개월 자원해서 연장한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뚜엣.
그녀를, 그리고 그녀 안에서 자라는 작은 생명을 살려야만 했다.
뚜엣과 아기가 그의 전부였다.
10월이 다가올수록, 규의 가슴은 무언가에 짓눌리듯 서서히 조여왔다.
끼엠마을엔 알 수 없는 긴장이 감돌았다.
바람은 숨 막힐 듯 무거웠고, 하늘은 잿빛으로 굳어 있었다.
요즘 장춘동은 늘 술 냄새를 달고 살았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탁하게 흔들렸고, 발걸음은 자꾸만 마을 쪽으로 비틀거렸다.
그건 불길한 징조이자, 너무나도 익숙한 파국의 전조였다.
일주일 전. 규는 뚜엣의 집을 찾았다.
그녀의 배는 제법 불러 있었고, 뱃속 생명의 작은 뒤척임이 느껴질 때마다 뚜엣은 그 움직임에 맞춰 숨을 고르곤 했다.
그날— 박규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 잘 낳아서… 우리 다 같이 한국에 가자.”
그 말엔 그의 마지막 희망이자 단 하나의 목표가 간절하게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늘은 숨 막히도록 무거웠고,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9월 30일 밤, 끼엠마을은 유난히 고요했다.
구름에 가려 별빛조차 숨은 하늘은 흐렸다.
흐엉 여사는 며칠째 말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숨결은 얕고 불규칙하게 오르내렸으며, 눈동자는 초점 없이 천장을 헤매는 듯 허공에 걸린 무언가를 더듬고 있었다.
뚜엣은 어머니 곁에 앉아 손을 놓지 않았다.
눈물이 말라붙은 뺨 위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있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지만, 그녀는 한순간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때, 흐엉 여사의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힘겹게 뻗은 손끝이 딸의 불룩한 배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아기… 따뜻해…”
떨리는 손끝이 뚜엣의 뱃속 생명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아이는… 살아야 해… 제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만은…”
그 말은 간절한 기도였고, 마지막 유언이었으며, 태어날 생명에게 보내는 축복이었다.
흐엉 여사는 딸의 뱃속에 깃든 작고 여린 생명을 향해, 자신의 남은 생명을 밀어 넣듯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흐엉 여사의 눈빛이 천천히 흐려졌다.
입술 끝엔 알 수 없는, 짧은 안도의 미소가 스쳤다.
그녀의 손이 뚜엣의 배를 마지막으로 쓰다듬은 뒤,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뚜엣은 마지막까지 따뜻했던 그 손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그리고 묵묵히 참아왔던 울음을 쏟아냈다.
밖에서는 가랑비가 조용히 내렸다.
문틈 사이로 스며든 한 줌의 바람이 흐엉 여사의 마지막 숨결을 데려갔다.
그날 밤—무지개는 뜨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축복은 뱃속의 작은 생명에게 기적처럼 닿았다.
그 아이는 두 달 일찍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0월 2일, 흐엉 여사의 장례식에는 뜻밖에도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뚜엣은 관 옆에 마련된 짚자리 위에 조심스레 앉아 있었다.
불룩한 배 때문에 자세를 자주 바꿀 순 없었지만, 두 손을 모은 채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 곁에는 깨끗한 군복 차림의 규가 허리를 곧게 펴고 묵묵히 조문객들을 맞았다.
마당에 향 냄새가 은은히 퍼졌고, 조문객들은 조용히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마을 사람들은 함께 슬픔을 나눴고, 건넛마을 노파까지 위로를 전하러 왔다.
그리고… 몇몇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작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몇 달러의 조의금.
그중 하나는 장기동 중위의 것이었다.
규의 인간적인 면모가 만들어낸 낯선 장면이었다.
조문객들의 발길이 뜸해질 무렵, 리차드와 린이 들어섰다.
모든 시선이 둘에게 향했다.
오랜만에 마을에 돌아온 린, 그리고 그녀 옆의 낯선 서양 남자.
둘은 묵묵히 향을 꽂고, 뚜엣과 규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리차드는 규와 악수 후 그의 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린은 뚜엣 옆에 조용히 앉아 어깨를 내어주었다.
뚜엣은 말없이 기대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 시각, 장춘동은 끼엠마을 장례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이난 거리 뒷골목에서 술에 취해 여자를 안고 있었다.
* * *
흐엉 여사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규는 곧장 부대로 복귀했다.
군인의 몸으로 마음대로 나올 수 없었다.
부대는 여전히 바빴고, 근무표는 빽빽했으며, 외출 허가는 쉽지 않았다.
린은 며칠 더 마을에 머물며 뚜엣 곁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규와 뚜엣, 그리고 리차드는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 소식이 장춘동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악마가 무슨 짓을 할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린은 조용히 찻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뚜엣은 홀로 남겨졌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충격은 그녀를 깊은 무기력과 식욕 부진으로 몰아넣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말없이 누워 지냈다.
규는 부대로 돌아가기 직전, 촌장을 찾아가 뚜엣의 안부를 매일 확인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웃들도 죽, 따뜻한 물, 엿, 소금물, 말린 허브 같은 것들을 챙겨다 주었다.
하지만 뚜엣은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와도 대답은 느렸고, 웃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시간이 이어지던 중,
10월 10일 새벽, 뚜엣은 예고 없는 진통을 느꼈다.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지면서, 온몸이 떨려왔다.
그녀의 신음 소리를 들은 이웃집 여자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이웃집 여자는 뚜엣의 상태를 살피는 동시에 능숙하게 뜨거운 물과 천을 준비했다.
이내 지친 뚜엣의 몸을 부축하고 진통에 맞춰 힘을 주도록 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생명의 울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예정보다 두 달이나 이른 출산이었다.
아기는 너무 작고 가벼웠고, 피부는 너무 얇아 속이 비칠 듯했다.
울음소리는 작고 가늘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했다.
그러나, 그 작은 몸은 분명 숨을 쉬고 있었다.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마을 경계근무 중이던 초병을 통해 부대에 전해졌고, 규는 중대장의 배려로 특별 외출 허가를 받아 마을로 달려왔다.
그가 처음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 너무 작고 가벼워서 손끝이 떨렸다.
정말 살아 있는 게 맞는지, 그 작은 몸에서 나는 미약한 숨결만을 오래도록 느꼈다.
그날 이후, 규는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듯했다.
10월 26일, 기억 속 학살의 밤이 불과 2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숨을 쉬고 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고, 몸은 말라붙은 나뭇가지처럼 굳어갔다.
규는 뚜엣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잠시 다른 곳으로 가서 산후조리를 하자.”
하지만 뚜엣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고, 예정보다 너무 일찍 아이를 낳은 그녀는 심신이 지쳐 있었다.
“오빠!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 혼이 아직 이 집에 머물고 있을 거야. 난 여길 떠날 수 없어. 지금은 안 돼.”
규는 더 이상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뚜엣과 아기를 피신시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규는 마지막 계획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10월 26일, 그날 밤만 무사히 넘기면 된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은신처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집 뒤편 숲과 맞닿은 작은 언덕을 택했다.
10월 20일, 비번을 받은 규는 이른 아침부터 삽질을 시작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고, 땅은 생각보다 깊게 파지지 않았지만 그는 묵묵히 작업을 이어갔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한 사람이 웅크리고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작은 동굴이 만들어졌다.
내부에는 대나무로 틀을 세우고, 입구 위는 칡덩굴과 풀잎으로 위장했다.
멀리서 보면 그저 언덕 아래 바위 그늘처럼 보이도록.
오후가 되어서야 작업이 끝났다.
규는 뚜엣을 데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풀잎을 헤치고 입구를 보여주자, 뚜엣은 놀란 눈으로 규를 바라봤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규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 안에 들어가 있어. 내가 데리러 올게.”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규는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모두 털어놓는 것은 심신이 지친 뚜엣에게 또 다른 충격일 뿐이었다.
김 일병과 린의 사례처럼, 모든 것이 그의 기억대로 흘러가지 않는 불확실성 속에서 굳이 불안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 * *
10월 23일 해질녘.
낮부터 하이난 거리에서 술을 퍼마시던 장춘동이 부대로 복귀 중이었다.
린이 일하는 가게 앞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린이 그를 보자마자 몸을 돌려 가게 안으로 황급히 숨었다.
그녀의 눈에는 마치 짐승을 마주친 듯한 극심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린의 그 반응에 장춘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부대로 돌아왔지만, 짜증과 분노가 머릿속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가시지 않았다.
결국 그는 끼엠마을로 향했다.
마을을 들쑤시든, 촌장을 괴롭히든, 부녀자를 건드리든—무언가를 부숴야만 이 울컥거림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마을 쪽 경계초소를 지나 논두렁 위로 발을 올리는 순간, 발을 헛디뎌 몸이 오른쪽으로 기우는 찰나였다.
탕!!!
총성이 논바닥을 찢었다.
순식간에 장춘동의 왼쪽 귀 윗부분이 떨어져 날아갔다.
고막을 스치는 열기와 피가 뒤엉켜 얼굴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끄아악!”
논바닥에 처박힌 그는 비명을 지르기 직전, 마을 쪽 빈집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햇빛에 반사된 조준경.
그곳은… 자신이 김정수 일병을 쐈던 바로 그 자리였다.
“10시 방향! 빈집이다!”
그가 경계초소를 향해 소리를 질렀고, 초병들이 그 방향으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논둑 아래 바짝 엎드린 장춘동은 떨리는 손으로 왼쪽 귀를 만졌다. 귀 윗부분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피범벅된 오른손으로 귓가를 감싼 장춘동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시각, 한 남자가 마을 뒤쪽 밀림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반 뜨엉.
3년 전, 린에게 마음을 전했다가 거절당한 뒤 마을을 떠나 베트콩이 되었다.
뛰어난 사격 실력을 인정받아 저격수로 뽑힌 그는, 전투 중에도 줄곧 고향 소식과 린의 소식을 놓치지 않았다.
장춘동이 린의 어머니와 린에게 저지른 짓을 전해 듣고, 그는 분을 삭일 수 없었다.
한 달 전, 마을 뒤편 밀림 속 게릴라 부대에 합류한 그는 오직 복수의 기회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살던 집에 몰래 내려왔다가 장춘동이 마을로 향하는 것을 봤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건들건들한 걸음걸이, 오만하게 치켜든 턱….
게릴라 동료들에게 들었던 장춘동의 모습 그대로였다.
반 뜨엉은 망설이지 않았다.
총을 들어, 그의 심장을 겨눴다.
장춘동이 김 일병을 쐈던 바로 그 자리에서—그는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탕!!!
백발백중의 뜨엉이 심장을 맞추지 못한 건, 바로 그 순간 술에 취한 장춘동이 논둑에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기 때문이었다.
밀림 속으로 사라지는 뜨엉이 어깨에 멘 총은—
장춘동이 김 일병을 쐈던 것과 같은 모델—모신나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