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비정한 유언

by 부지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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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유서 깊은 부촌, 북악산 자락을 따라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다 보면 높다란 담벼락 사이로 유독 허름한 단층 가옥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6.25 전쟁 후 지어져 반세기가 넘는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낸 이 집은, 이끼가 눌어붙은 대문과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페인트 외벽으로 겨우 그 형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행인들이 혀를 쯧쯧 차며 지나칠 법한 낡고 보잘것없는 집이었지만, 실상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조망을 선점한, 현 시점에 30억 원을 호가하는 금싸라기 땅 위의 노옥(老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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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넓은 서재는 이 집의 기묘한 무게감을 대변하고 있었다. 한쪽 벽면을 빈틈없이 채운 거대한 서가에는 수천 권의 책이 숨을 죽인 채 들어차 있었고, 그중 상당수는 누렇게 변색된 영어 원서들이었다.

특히 손때가 짙게 묻은 책상 바로 뒤편에는 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의 소설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노인과 바다>와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지금엔 구하기도 힘든 영어 표지 속 살아 움직이는 원문들은, 평생을 영어교사로 그리고 이름 없는 수위로 살아온 한 노인의 가슴 속에 얼마나 거대한 바다와 치열한 전장이 아직도 파도치고 있는지를 대변해주는 은밀한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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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옆 창가, 햇살이 가장 길게 머무는 곳에 놓인 커다란 캣타워는 이 정적인 공간에 유일하게 생기를 더하는 장치였다.

이 수직의 영토를 차지한 주인공은 검은 고양이 ‘깜탄’이었다.

2년 전 겨울, 한심중학교 수위실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길에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얼어 죽어가던 핏덩이를 발견한 노인이 품에 안고 데려온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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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늙은 집사이자, 이 낡은 가옥의 주인은 올해 일흔일곱 살의 김규식씨였다. 그는 사학재단 한심재단과 한심병원의 실소유주였으나, 평생 그 화려한 신분을 철저히 감춘 채 살아왔다.

그는 예순한 살까지 재단 산하 한심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퇴임 후엔 교무실에서 수위실로 내려가 정문을 지키는 괴팍한 노인으로 학생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가 감추려고 한 남루한 껍데기 이면에는 지독한 속죄의 서사가 흐르고 있었다.

부친이 친일의 대가로 일구고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부역하며 쌓아 올린 막대한 부로 일궈낸 ‘일화(日和)재단’을 마지못해 물려받은 뒤, 치욕스러운 재단의 이름을 ‘한심(韓心)’으로 바꾸고, 스스로를 무덤 같은 삶에 가둬버린 노인의 평생은, 피 묻은 유산을 닦아내기 위한 처절한 기록이자 소리 없는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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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밤.

서재 한가운데 낡은 소파에 앉아 있는 규식씨의 모습은 꺼져가는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사실 지금의 이 모습은 그가 평생에 걸쳐 스스로 자초하고, 어쩌면 간절히 기다려 온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평생 하루 두 갑이 넘는 독한 담배를 연신 태워댔고, 매일 밤 지독한 술로 몸과 정신을 마비시켰다.

건강검진은 단 한 번도 받지 않았으며, 자식들이 병원 예약을 잡아둬도 끝내 그 문턱을 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지독한 환멸의 표현이었고,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부터 영원히 달아나고 싶어 했던 한 남자의 처절한 도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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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3개월 전 날아든 폐암 말기 통보를 그는 그토록 오래 기다려 온 운명의 친절로 받아들였다.

잔혹한 병마는 그의 육신을 빠르게 갉아먹었고, 푹 파인 볼과 창백한 안색, 뼈만 남은 손등은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오늘 밤. 그에게 생명을 빚지고 그의 무릎 위에 가만히 웅크려 앉아 있는 깜탄이는 마치 호위무사 같았다. 규식씨의 기침 소리가 서재의 무거운 정적을 흔들 때마다 녀석의 귀는 예민하게 쫑긋거렸다.

녀석은 노인의 마른 손등을 핥아대다가도,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낯선 사람들을 향해 태양 같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하악질을 해댔다.


규식씨를 중심으로 양옆에는 짙은 밤색의 3인용 소파 두 개가 ‘ㄷ’자 구도를 이루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옹이가 패인 낮은 탁자가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지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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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식씨의 왼편에는 간병인 차윤희가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규식씨의 제자이자 간호사였던 그녀는 의료사고의 누명을 쓰고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나, 동창인 한심의 손에 이끌려 3년 전부터 규식씨의 곁을 지켰다.

윤희의 옆으로 규식의 핏줄인 장녀 한심과 차남 한식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슬픈 표정을 흉내내고 있었지만, 눈동자 너머로 번들거리는 탐욕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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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식씨의 오른편 풍경은 사뭇 달랐다.

규식씨의 고목나무 같은 손을 꼭 감싸쥔 채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이는 김윤정이었다. 그녀는 규식씨의 대학 동기이자 첫사랑이었다.

규식씨가 그녀를 위해 숨겨둔 거대한 비극 속에 둘의 인연은 끊겼고, 이후 그녀는 규식씨의 절친한 친구인 진회와 결혼했다.

규식씨는 물려받은 재단을 가장 신뢰하는 친구 진회에게 맡겼고, 진회는 평생을 성실한 이사장으로 헌신했다.

오늘 밤, 윤정은 해외출장 중인 남편을 대신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윤정 옆에는 규식씨의 월남전 전우이자 평생의 벗, 2년 전 자진퇴임한 한심병원의 전 원장 도현수가 바위처럼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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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도 원장 옆에는 규식 씨의 고문변호사이자, 윤정의 딸인 구자영이 서류 가방을 무릎에 올려 놓은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마침내 규식씨가 눈짓을 보내자, 자영이 인장을 뜯으며 유언장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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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김규식 선생님의 유언장을 낭독하겠습니다.”

곧이어 낭독된 내용은 서재의 공기를 한순간에 얼려버릴 만큼 차갑고 단호했다.

“첫째, 본인 소유의 한심재단 및 한심병원의 모든 지분을 사회에 환원하며, 향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한다. 상속인을 포함한 본인의 친족들은 재단 운영에 일절 관여할 수 없다.”

“뭐라고요?!”

한식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자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문구로 넘어갔다.

“둘째, 현재 본인이 거주 중인 가옥은 사후 매각을 전제로 이미 매매 계약을 체결하였다. 매각 대금 30억 원 중 상속인들에게는 유류분에 해당하는 15억 원을 균등 분할 지급한다. 그리고 제반 비용을 제하고 남은 금액을 베트남에 사는 ‘팜 뚜이 뚜엣’에게 상속한다.”

서재 안은 순식간에 산소가 빠져나간 듯한 진공 상태에 빠져들었다.

먼저 침묵을 깬 한심이 히스테릭한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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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제정신이세요? 이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다 퍼줘요? 나랑 한식이는 안중에도 없어요? 우리는 아버지한테 아무것도 아니냐고요!”

한심이 규식씨를 향해 달려들듯 발악하려던 그 순간!

규식씨 무릎에 웅크려 있던 깜탄이가 발톱을 세우고 전광석화처럼 솟구쳐 한심에게 달려들었다.

한심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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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이 바통을 이어받아 자영에게 삿대질을 했다.

“변호사님! 아니, 누나! 이 유언장은 무효야! 아버지가 노망이 들지 않고서야! 그리고, 누구? 팜 뭐? 그 여자는 또 누구야! 혹시 아버지가 몰래 숨겨놓은 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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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이 함부로 내뱉는 말들이 규식씨의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규식씨는 밀려오는 격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서재가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도 한식은 자영을 밀치며 폭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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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식의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쳤다.

찰싹!

서재가 울릴 정도의 파열음과 함께 한식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평생 사람을 살리던 손으로, 평생 누구에게 손찌검 한 번 안 해본 현수의 눈에 서슬 퍼런 안광이 서렸다.

“그만두지 못해! 이 짐승만도 못한...”

늘 인자한 아저씨였던 현수의 호랑이 같은 위엄에 압도당한 남매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도 감히 대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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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쓰러진 아버지를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비릿한 욕설을 침처럼 내뱉으며 서재를 빠져나갔다.


쾅!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가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작가의 말>

이번 이야기도 지난번 마무리한 <시한부 할멈의 고약한 소원>처럼

창작소설을 유튜브 대본으로 리라이팅해 제 채널에 올리고 있습니다.

유튜브는'15분 낭독 드라마 -> 3분 숏 드라마'로 형식을 바꾸는 등

맨 땅에 헤딩해 가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19회차로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각 회차를 3분 안팎의 숏드라마로 만든 결과물이 궁금하시다면

유튜브나 네이버에서 <꽃할배 청춘극장>을 검색하시면

VEO 3로 만든 8초 동영상, 나노 바나나로 만든 소프트한 고화질 유화(움직이는 효과),

Vrew로 편집하면서 더빙한 등장인물 맞춤 목소리 등등

오감만족 드라마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제 전작 '시한부 할멈의 고약한 소원'도 82분 몰아보기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제 소설에 언제나 등장하는 마스코트.... 고양이가 이 소설에도 등장합니다.

이름은 깜탄이입니다. 녀석의 활약을 응원해 주시고, 많이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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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