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과 한식이 난장판을 벌이다 내쫓기듯 나간 서재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남았다.
마치 전쟁터의 포화가 잠시 멈춘 듯한 고요함이었다. 하지만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창밖 밤하늘이 갑자기 번쩍하며 섬광을 내뿜더니, 곧이어 고막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가 온 집안을 흔들었다.
예고에도 없던 폭우가 성북동의 낡은 지붕 위로 사정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식놈들이 아니라 원수들이구먼. 원수들이야."
현수씨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옮겼다. 그는 방금 전까지 윤희가 앉아 있던 자리로 가서 규식씨의 가쁜 숨소리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예리하게 살폈다.
규식씨는 대답 대신 힘없이 웃어 보이며 현수씨의 손을 토닥였다.
그사이, 윤희가 조용히 움직였다.
그녀는 마치 이 모든 소란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침착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서재 안에는 은은한 꽃향기가 감도는 따뜻한 차와 정갈한 다과가 차려졌다.
빗소리가 거세질수록 서재 안의 차 향기는 더욱 짙게 피어올랐다.
규식씨 옆 협탁 위에 웅크려 있던 깜탄이가 '야옹' 하고 짧게 울었다.
규식씨는 거친 손으로 깜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윤희를 바라보았다.
"깜탄이도 배고픈 모양이야."
윤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캣타워 옆 장식장 문을 열었다.
그녀는 캣타워 아래 사료 그릇에 갈색 알갱이들을 가득 부어주었다. 물그릇도 깨끗하게 닦아 시원한 물로 갈아주자 깜탄이가 협탁에서 폴짝 뛰어내려 꼬리를 바짝 세우고 사료를 오독오독 씹기 시작했다.
녀석이 사료를 씹는 경쾌한 소리가 빗소리와 어우러져 기묘한 평화로움을 만들어냈다.
"저놈들... 저러고 나가서 또 무슨 궁리를 할지...."
윤정씨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규식씨의 마른 손을 여전히 놓지 않은 채였다. 현수씨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탐욕에 눈이 멀어 죽어가는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나간 자식들에 대한 탄식이 오갔다.
규식씨는 한참 동안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이런 모습 보여줘서 정말 미안하네. 그래도...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사실은 내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죽기 전에 두 사람을 꼭 보고 싶었어."
규식씨의 눈가에 순식간에 물기가 어렸다.
평생을 죄책감이라는 사슬에 묶인 채 스스로를 학대하며 견뎌온 노인의 눈물 앞에 현수씨와 윤정씨의 가슴도 무너져 내렸다.
두 사람의 눈에서도 소리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서재는 순식간에 슬픔의 파도로 가득 찼지만, 그것은 아까 자식들이 남기고 간 불쾌한 감정과는 다른, 아주 따뜻하고 깊은 슬픔이었다.
"형님, 그게 무슨 약한 소립니까."
현수씨가 코를 훌쩍이며 짐짓 씩씩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그럼 오늘 우리, 이 비를 핑계삼아 형님 살아온 얘기나 나누며 밤을 새우죠. 옛날 얘기도 하고, 월남전 때 죽다 살아난 무용담도 다시 듣고 말입니다."
윤정씨도 찬성하듯 젖은 눈으로 미소 지었다.
"그래, 규식아. 그게 좋겠다. 안 그래도 나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거든."
규식씨는 두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엷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은 뭘 물어도 다 대답해 줄게.“
그때, 옆에서 가만히 늙은 세 친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자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괜찮으시면 오늘 나누시는 이야기들을 제가 녹음해도 될까요? 훗날... 누군가에게는 꼭 전달되어야 할 이야기들인 것 같아서요.”
그녀의 시선이 잠시 현관 쪽을 향했다.
그녀가 녹음하게 될 규식씨의 삶이 한심과 한식에게 전달되어, 그들이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규식씨는 자영의 의중을 알아챈 듯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럴까? 기록까지 할 정도로 대단한 인생은 아니지만...”
규식씨의 허락이 떨어지자 자영은 가방에서 휴대용 녹음기를 꺼내 조용히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규식씨가 짧은 신음과 함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규식씨의 옆을 지키던 윤희가 발밑의 응급키트를 열어 병원에서 미리 처방받은 돌발성 통증 완화제를 꺼냈다.
전직 병원장인 현수씨가 규식씨의 상태를 예리하게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자 , 그녀는 조심스럽게 약을 처치했다.
잠시 후 규식씨의 일그러졌던 미간이 서서히 펴지며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고통을 견뎌낸 규식씨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좀 살 것 같구먼.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규식씨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규식씨와 윤정씨, 그리고 현수씨는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문득 규식씨가 무언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말야, 이렇게 이야기꽃을 피우려니 이 밍밍한 차는 영 안 어울리는구먼. 어때? 우리 술 한잔 할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벗들이랑 술 한잔 해야지."
그 말에 마주보던 윤정씨와 현수씨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은 무슨! 그리고 죽긴 왜 죽어? 그냥 오늘 우리 다 같이 마시고 죽지 뭐"
윤정씨가 목소리 톤을 높여 너스레를 떨자 모두 활짝 웃었다.
무겁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자 윤희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나가서 술상 좀 봐올게요. 제대로 대접해 드려야죠."
"그래, 그래. 형님은 내가 돌보고 있을 테니 맛있는 것 좀 만들어와."
현수씨가 신이 나서 외쳤다. 그 때 규식씨가 윤희를 불러 세웠다.
"고생스럽게 안주 만들 것 없어. 우리 단골 막창집 알지? 거기서 배달시켜 먹자구. 이 친구들촌스럽게 소주만 좋아하니 소주나 좀 넉넉히 사 와."
윤정씨와 현수씨가 어린아이처럼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영도 셋의 모습이 귀여운지 소리 내어 웃었다.
윤희가 주문을 하러 주방으로 나가자, 규식씨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자영을 불렀다.
"자영아, 저기 책장 맨 아래칸 열어 보면 술병 하나 있을 거야. 그것 좀 꺼내 오너라."
자영이 책장으로 가서 허리를 굽혀 술병 하나를 찾아냈다.
투명한 병 안에는 진한 호박색 액체가 담겨 있었고, 라벨에는 낯선 글자가 적혀 있었다.
"형님! 그거 '퐁당 럼' 아녜요?“
현수씨가 반색을 하자, 규식씨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아니겠어? 내가 얼마 전 사람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친구가 하노이 출장갔다 오면서 사 온 거야. 이걸 먹을 날이 있을까 싶었는데... 오늘 뚜껑을 따는구먼."
잠시 후, 초인종 소리와 함께 고소한 막창 냄새가 서재 가득 퍼졌다.
윤희가 배달 온 막창과 술상을 정갈하게 세팅했다.
그녀가 자리를 비켜주려 하자 규식씨가 그녀의 소매를 붙잡았다.
"어디 가게? 여기 앉아. 나랑 짠~ 해야지."
그렇게 규식씨의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마지막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드디어 탁자 위에 퐁당 럼과 고소한 막창 안주가 차려졌다.
현수씨는 조심스럽게 술병을 땄다.
그러자 병 입구에서 달큼하면서도 묵직한 바나나 향이 훅 끼쳐 올랐다.
"형님은 입만 대세요. 진짜 마시는 건 안 됩니다!"
"그래. 넌 맛만 봐! 내가 오늘 네 흑장미야."
벗들의 당부에 규식씨는 허허 웃으며 잔을 들었다.
"자, 한 잔 할까?"
규식씨의 선창에 모두가 술잔을 맞댔다.
규식씨는 잔을 든 채 현수씨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동시에 달싹이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못! 하이! 바! 요!"
갑작스러운 외국어 구호에 자영과 윤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현수씨가 껄껄 웃으며 설명했다.
"베트남 식으로 '하나, 둘, 셋, 건배!'라는 뜻이야. 56년 만에 해 보네!"
윤정씨가 "못 하이 바 요!"를 외치며 자신의 잔을 규식씨의 잔에 힘차게 부딪쳤다.
"규식아, 잠깐만!"
윤정씨는 방금 선언한 대로 자신의 술잔을 재빨리 비우고, 규식씨의 술잔도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는 목을 타고 넘어가는 독한 럼주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시원하게 웃었다.
규식씨는 비록 술 한 모금 마시지 못했지만, 코끝에 맴도는 퐁당 럼의 향기와 친구들의 웃음소리만으로도 이미 취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지만, 서재 안은 노릇노릇 고소한 막창 냄새와 달큰한 바나나향이 뒤섞여 불콰한 열기로 달아올랐다.
그렇게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때쯤, 번개가 번쩍하며 서재를 한 차례 훑고 지나가더니, 곧이어 묵직한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그 소리가 잦아들며 잠시 정적이 내려앉자, 윤정씨가 규식씨에게 천둥 같은 질문을 툭 던졌다.
"야! 김규식. 나 진짜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내가 정말 네 첫사랑이야?"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규식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캣타워 위 깜탄이가 마치 규식씨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이 소설은 매주 금요일 오전 0시에 발행됩니다.
이 소설은 유튜브 대본으로도 쓴 저작물입니다.
유튜브는 오늘(23일) 오전 7시에 이 소설의 통합본 영상(52분)을 업로드합니다.
1~19화에서 핵심서사를 압축하고, 대화 위주 대사를 뽑아 VEO 3로 만든 동영상과, 여기 첨부된 실사 기반 소프트한 유화 이미지가 움직이게 만든 영상입니다.
소설로 읽으시는 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소설보다 먼저 결말을 보시게 되겠지만요.^^;;
"뭉클한 반전과 울컥한 감동"을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혹시 관심 있으신 분들은 네이버나 유튜브에서
'꽃할배 청춘극장'을 검색하셔서 들어오시면
제 전작이자 첫 유튜브 영상인 '시한부 할멈의 고약한 소원'도 다양한 맛(OST 10곡 포함)으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제 유튜브 채널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www.youtube.com/@%EA%BD%83%ED%95%A0%EB%B0%B0%EC%B2%AD%EC%B6%98%EA%B7%B9%EC%9E%A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