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널 빼내야 했거든...

by 부지깽이

"내가 정말 네 첫사랑이야?"

윤정씨의 돌발적인 질문이 서재의 공기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빗소리조차 멈춘 듯한 완벽한 정적이 서재를 가득 채웠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윤정씨의 딸 자영이었다.

그녀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손에 든 술잔을 놓칠 뻔했다.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어른’ 규식 아저씨.

셋이 대학교 동기동창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의 관계가 삼각관계? 그것도 엄마가 아저씨의 첫사랑이었다니….


"엄마, 뭐, 뭐라구요? 아저씨 첫사랑이 엄마라고요?“

경악한 표정으로 묻는 딸을 보던 윤정씨가 영악한 아이같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규식씨를 쏘아보았다.

간병인 윤희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놓고 규식씨를 바라보았다.

대충 내막을 아는 현수씨는 "아이쿠! 형님!… 오늘은 그냥 못 넘어가시겠네"라며 껄껄 웃었다.

규식씨는 쑥스러운 듯 마른기침을 했지만, 입가에 번지는 슬픈 미소는 감추지 못했다.


그때 깜탄이가 “야옹, 냐옹~” 울며 규식씨의 손등을 까슬한 혀로 핥았다.

녀석은 2년 전 겨울 규식씨에게 생명을 빚진 후, 규식씨의 ‘혼잣말 동무’가 됐다.

규식씨가 주름진 손으로 츄르를 짜 주면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을 중얼거리면 녀석은 그의 손가락까지 츄르릅 츄르릅 핥으면서 귀를 바짝 세우고 이야기를 들어줬다.

지금 녀석은 규식씨에게 “다 털어 놔요. 나만 알고 있긴 너무 재밌고 슬퍼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규식씨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망설이자 윤정씨가 누가 봐도 과도한 동작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규식아! 니 친구... 자영이 아빠가 평생 그걸로 날 얼마나 들볶았는지 알아?"

윤정이 샐쭉하게 웃으며 퐁당 럼이 담긴 잔을 비웠다.

"준회가? 설마… 그 샌님이?"

“으이구! 내가 자영 아빠 바가지 좀 긁으면 '당신 마음 속엔 아직도 수위실 김 씨가 있는 거 아니야?'라고 받아치는데, 기가 차서 정말….”

“네? 수위실 김씨요? 하하하. 규식 형님을 그렇게 부른다고요? 준회 형님도 참!”

“준회 녀석, 여전하구먼!”

윤정씨의 하소연에 규식씨와 현수씨가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니?”

윤정씨가 샐쭉해져서 묻자 규식씨가 짐짓 머리를 긁는 척 했다.

“으이구! 김규식. 네 발연기는 어째 평생 늘지를 않니? 1969년이잖아!”

규식씨는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앞에 비 내리는 성북동이 아니라, 1969년의 싱그러운 교정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맞아! 1969년 4월. 난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서 헤밍웨이를 읽고 있었어. <노인과 바다>였나, <무기여 잘 있거라>였나… 그런데 갑자기 도서관 문이 쾅 열리더니 웬 여학생 하나가 뛰어 들어오더라고."

규식의 목소리가 어제 일인 듯 생생해졌다.

"그녀가 책상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가더니 목청껏 소리쳤지. '학우 여러분! 독재정권을 무너뜨립시다! 다들 책을 덮고 거리로 나갑시다!'라고 말이야."

"호호호! 내가 정말 그랬어?"

윤정이 두 볼을 붉히며 웃었다.

"말도 마. 네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도서관 천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 공부하던 친구들이 멍해져서 그날 공부를 포기하고 가방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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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너는? 너는 어떻게 했는데?"

윤정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 나는 그냥 널 따라갔지. 그날부터였어. 내가 널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 게."

규식의 멋쩍은 고백에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어머! 어르신, 진짜 로맨티시스트셨네요!"

"세상에, 아빠한테는 한 번도 못 들어본 얘기예요. 엄마가 그렇게 인기가 많으셨다니!"

윤희와 자영이 입을 가리며 환호했고, 현수씨도 “형님이 정말 그러셨다구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정씨는 그 때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짐짓 능청을 떨며 규식을 바라보았다.

"그랬나? 그런데 규식아. 넌 정작 학생운동은 안 했잖아? 맨날 나 집회 나갈 때 도시락이나 싸 들고 오고 말이야."

규식이 빙그레 웃으며 윤정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랬지. 그때 내 관심은 온통 너였으니까. 최루탄 가스가 자욱한 길바닥에서도 난 네 얼굴밖에 안 보이더라고. 행여나 네가 넘어져 다칠까 봐… 그 생각뿐이었어."

다시 한 번 윤희와 자영의 비명이 서재를 가득 채웠다.

자영은 신기한 듯 웃으며 이 모든 대화를 담고 있는 녹음기의 불빛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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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씨는 수줍은 소녀처럼 얼굴이 발그레해지더니 퐁당 럼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으이구… 그랬었지. 그래서 선배들이 쟤 누구냐고, 부르주아의 자식이라 연애질만 하러 학교 오냐고 나까지 싸잡아 놀렸잖아, 그래서 내가 잔디밭에서 너 사상교육 시켰지 아마."

"응…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

규식씨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지만, 그 안에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퇴색되지 않은 진심이 실려 있었다. 왠지 쑥쓰러워진 윤정씨는 술잔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빛이 어느 순간 갑자기 흔들렸다.

"그런데 규식아. 그렇게 나만 보였다던 네가… 갑자기 왜 군대로 도망친 거야? 더구나 월남으로...?"

순식간에 서재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규식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월남전의 자욱한 화약 냄새가 다시 그를 덮친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깜탄이의 등을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빗소리가 다시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규식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 헤밍웨이의 소설들을 지나, 베트남에서 온 퐁당럼 병에 머물렀다. 그는 이제껏 누구에게도, 심지어 윤정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자기 인생의 가장 아픈 비밀을 꺼내 놓기로 결심한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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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남산으로 끌려간 널 빼내야 했거든."

폭탄 같은 말이었다. 윤정의 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려다 멈췄고, 현수와 자영, 윤희는 숨 쉬는 법조차 잊은 듯 규식씨를 바라보았다.

그의 맑은 눈동자 속에 사랑하는 여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불길 속으로 던졌던 한 청년의 비극적인 거래가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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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https://youtu.be/o3a8y1H5ABY?si=8BVhElDuwbnicPHb 에서 감상하세요.

(핸들 : @꽃할배청춘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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