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넌 왜 그 지옥에 뛰어든 거야?

by 부지깽이

“남산으로 끌려간 널 빼내야 했거든.”

규식씨가 평생 숨겨온 비밀을 털어놓자, 서재 안의 공기는 1969년의 비틀린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중앙정보부라는 서슬 퍼런 공포가 창밖의 천둥소리와 함께 서재를 짓눌렀다.


가장 큰 충격에 빠진 것은 윤정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퐁당 럼이 든 소줏잔을 움켜쥐었다. 남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평생 잊지 못한 악몽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지옥에서 자신을 꺼내 준 사람이 지금 바로 눈앞에서 숨을 헐떡이는 규식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윤정씨는 타는 듯한 목을 축이려 무의식적으로 빈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애잔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던 규식이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들었다. 하지만 퐁당 럼 병은 어느새 비어 있었다.

간병인 윤희가 재빨리 새 소주병을 건넸다. 현수씨가 그 병을 받아 뚜껑을 따서 윤정씨의 잔에 술을 따라주려다, 소주병을 규식씨에게 건넸다.

이 순간, 윤정의 술잔과 빈 가슴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규식씨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규식씨는 앙상한 손으로 소주병을 받아 윤정씨의 잔에 술을 채웠다. 다른 사람들의 빈 잔에도 술을 따라줬다. 투명한 액체가 잔을 채울 때마다, 56년 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규식씨의 과거도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 아버지는… 친일파셨어.”

규식씨의 첫 마디는 1969년에서 4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갔다.

“아버진 일제강점기 때 나라와 민족을 팔아 막대한 부를 쌓으셨지. 1945년 해방이 되고 반민특위가 열렸을 때, 아버지는 제일 먼저 재판에 넘겨지셨어. 지금도 친일인명사전을 펼치면 우리 아버지 이름이 버젓이 나오지. 하지만 아버지는 처세에 능한 분이셨어. 이승만 쪽에 줄을 대서 전 재산의 절반을 헌납하고 친일의 흔적을 흐릿하게 만들었어.

그러다 6.25가 터지자 미국 쪽에 줄을 대 군수품 사업으로 더 큰 부를 일구셨고… 그렇게 이승만 정권 밑에서 떵떵거리며 사셨지.”


규식씨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줏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하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그저 그 독한 알코올 향으로 정신을 붙들고 있는 듯했다.

“난 1950년에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자랐지.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아버지는 이번엔 혁명세력에 막대한 애국헌금을 바치고 이권이 걸린 사업권을 따내셨어. 그때 비자금 세탁 명목으로 세운 게 지금의 우리 재단이야. 처음 이름은 천황의 영광을 미화한 ‘일화(日和)재단’이었지. 겉으로는 ‘한 떨기 꽃’이라는 뜻의 일화(一花)로 포장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명예 이사장으로 추대해 정권의 비호를 받았어.”


규식씨의 목소리엔 물려받은 유산에 대한 부끄러움이 묻어 있었다. 규식씨는 무릎 위에서 골골대며 잠든 깜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난 1970년, 월남에서 돌아와 폐인처럼 살았어. 그러던 중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재단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어. 내가 제일 먼저 한 게 이름을 바꾸는 거였지. ‘한심(韓心)’. 우리 민족의 마음이라는 뜻으로 말이야. 이사진을 전부 물갈이하고 군사정권에 바치던 비자금도 서서히 줄여나갔지. 아까 뛰쳐나간 큰애 이름을 한심으로 지은 것도 내 나름의 속죄였어. 녀석은 학교 다닐 때마다 이름이 그게 뭐냐고, 개명해 달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난 끝내 허락해 주지 않았어.”


윤희가 주방에서 가져온 따뜻한 물로 목을 축인 규식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우리 집안이 부끄러웠어. 그래서 아버지가 원하던 법대 대신 영문과로 도망친 거야. 난 헤밍웨이를 동경했어. 그의 책들을 읽으며 그처럼 자유로운 소설가가 되고 싶었거든. 하지만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어. 나 몰래 사람을 붙여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셨어.”


말을 멈춘 규식씨의 시선이 잠시 윤정씨에게 머물렀다.

윤정씨는 이미 소주를 몇 잔째 들이켠 뒤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고가 올라간 거야. 내가 김윤정이라는 여학생을 쫓아다니는데, 그 여자가 학생운동 주동자라고 말이야. 아버지는 집안 말아먹게 생겼다고 노발대발하시며 날 당장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 하셨지. 그러다 네가 남산 중앙정보부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세상은 무너졌어.”


규식씨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그곳은 한 번 잡혀 들어가면 모진 고문을 당해 불구가 돼서 나오거나 죽어서 나오기도 한다는 걸 알았어. 여학생들은 성폭행까지 당한다고... 난 미칠 것 같았어. 그래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어. 윤정이만 빼 달라고. 그 여자애만 살려주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윤정씨의 입술에서 꾹꾹 눌러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뜨거운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막대한 돈과 인맥을 동원해 널 빼내셨지. 그리고 내게 거래의 대가를 요구하셨어. 유학 대신 군대를 가라고. 미국에 보냈다가 딴짓할지 모르니, 후방 부대의 편한 보직에 꽂아넣겠다고 하셨지. 네가 풀려난 걸 확인하고 난 군대로 끌려갔어.”


서재 안은 윤정씨의 오열과 거세진 빗소리만 가득했다. 자영이 어머니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안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


“다 지난 일이야. 다 내 팔자고 내 업보지. 자, 자…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네. 술이나 더 먹자고.”

규식씨가 애써 분위기를 돌려보려 했으나, 모녀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윤희도 연신 눈물을 훔쳤다.

딸의 품에 안겨 실컷 눈물을 쏟은 윤정씨가 감정을 추스르고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거기서 보낸 며칠이 평생 악몽이었어. 나만 먼저 풀려난 게 너무 미안했지만... 평생 그 일이 이해가 안됐는데... 그 뒤에 네가 있었을 줄이야... 규식아, 늦었지만 정말 고마워.”


“고맙긴... 우리 잘못이 아니야. 시대의 소용돌이에 힘없는 우리가 끌려들어간 거야. 그러니 이제 그 지옥같은 시간 떨쳐버려.”

“그래... 그래 볼게... 그런데 네가 아프지 않아야 내가 이 빚을 갚을 텐데... 그러니 어서 나아서 내가 빚 갚게 해 줘. 알았지?”


윤정씨의 말에 규식씨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고, 그 웃음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알았다. 딸이 건넨 티슈로 얼굴에 남은 눈물을 훔친 윤정씨가 문득 규식씨에게 물었다.

“그런데… 후방 부대로 갔다던 네가, 왜 갑자기 베트남전에 참전한 거야? 왜 제 발로, 그 지옥으로 뛰어든 거냐고!”




유튜브 https://youtu.be/o3a8y1H5ABY?si=8BVhElDuwbnicPHb 에서 감상하세요.

(핸들 : @꽃할배청춘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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