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식씨의 목소리는 갈수록 갈라졌다.
폐부 깊숙이 박힌 진실을 끌어올릴 때마다 가슴이 쿡쿡 쑤시는 듯했다.
창밖의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유리창을 깨부술 듯 때려댔고, 서재 안의 공기는 규식씨가 뱉어낸 무거운 진실들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윤희가 소리 없이 일어나 주방으로 사라졌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생강차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규식씨의 앞에 차를 조심스럽게 놓아주었다.
규식씨가 고맙다고 말하고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 온기가 스며들자 손끝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군대 생활이라….”
규식씨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입을 뗐다.
“남들은 복에 겨운 소리 한다고 욕했지만, 나에겐 그 편안함이 지옥이었어. 아버지가 손을 써서인지, 자대 배치 받자마자 고참이건 간부건 나를 상전 모시듯 했어. 훈련은커녕 내무반에서 책이나 읽으라고 하는데, 그 배려가 너무 역겨웠어. 내 인생은 여전히 아버지 손바닥 위 장난감 같았으니까.”
그의 시선이 책상 뒤 헤밍웨이 원서들로 향했다.
“매일 <무기여 잘 있거라>를 탐독했어. 1차 세계대전의 피비린내가 스며든 그 문장들 속에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비겁한 평화를 누리느니 차라리 모든 게 파괴되는 전쟁터로 뛰어들고 싶었어. 아버지의 돈도, 인맥도 통하지 않는 거대한 운명 속에 나를 던져버리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아무도 몰래 월남 파병 지원서를 낸 거야.”
술잔을 든 윤정씨의 얼굴이 굳어갔다. 그녀의 기억 속 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남자였는데, 그 내면에 이토록 서슬 퍼런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어. 어머니는 부대까지 찾아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통곡을 하셨어. 하지만 난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어. 만약 아버지가 이번에도 내 길을 막는다면, 탈영해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지겠다고 선언했지. 학교도, 부모님도 다 버리고 평생 유령처럼 살겠다고 말이야.”
그는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토록 반대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고집을 꺾으셨어. ‘그래, 다녀와라. 다녀오면 더 큰 기회를 만들어주마’라면서…. 아버지는 이미 계산을 끝내신 거였어. 월남 참전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군사정권 눈에 얼마나 기특하게 보일지, 그 아들이 자신의 사업에 얼마나 큰 자산이 될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확신하고 계셨어.”
“무엇을요?”
자영이 홀린 듯 물었다.
“내가 월남에 가더라도 결코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 이미 미군 고위 장교들에 줄을 대놓으셨던 거야. 내 학력과 영어 실력을 이용해 한국군 전투 부대가 아닌, 미군 사령부 통역병 보직으로 빼돌릴 복안을 다 짜놓으신 거지. 아버지는 전쟁터조차 돈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셨어. 그렇게 난 어머니의 통곡을 뒤로하고, 월남으로 향하는 거대한 배에 몸을 실었네.”
말을 마친 그가 참았던 기침을 터뜨렸다.
윤희가 급히 따뜻한 물을 건네며 등을 쓸어내렸고, 현수씨가 묵직한 손으로 규식의 손을 덮어 쥐었다.
“형님, 형님은 이제 좀 쉬세요.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자영이 규식씨와 현수씨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아! 그래서 아저씨가 월남에 가신 거였군요. 원장님이랑은 그때 만나신 거고요, 그렇죠?”
그녀의 질문에 현수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규식씨가 숨을 몰아쉬며 현수씨의 손등을 두드렸고, 이제 이야기의 주인공은 현수씨로 바뀌었다.
“그래. 이제 내 얘기를 해 볼게. 난 형님과 정반대였어.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지. 고등학교는 겨우 마쳤고, 대학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어. 동생만 셋인데 늙으신 부모님은 잔병치레하기 바쁘셨지. 그때 월남에 갔다 오면 집안 살림 밑천을 마련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난 주저 없이 파병을 자원했지.”
현수씨의 눈에 56년 전의 비장함이 서렸다.
“전쟁터가 무섭지 않았느냐고? 아니, 가난이 더 무서웠어. 가난 때문에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평생 남의 집 머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게 더 두려웠지. 난… 의사가 되고 싶었거든. 사람을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 가면서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려 했어.”
그의 고백에 서재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숙연해졌다.
“전투병으로 배치받았지만, 틈만 나면 의무병을 졸졸 따라다녔어. 어깨너머로 지혈하는 법, 소독하는 법을 배웠지. 다행히 내 간절함이 통했는지, 의무병 고참이 의무병 보조 자리에 결원이 생겼을 때 상부에 요청해 나를 자기 밑으로 데려갔지. 난 부상당한 전우들을 치료하며, 밀림 속에서도 의사의 꿈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어.”
창밖 천둥이 포성처럼 울렸다.
그의 목소리가 전쟁터로 다시 돌아간 듯 떨렸다.
“그러다 운명의 그날이 왔어. 밀림 수색 중 베트콩들의 기습을 받았지.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지고 비명이 난무했어. 내게 친형 같았던 그 의무병 고참이… 내 눈앞에서 쓰러졌어. 미군 포사격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부대로 돌아왔을 때… 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악마와 천사를 만났어.”
그의 말에, 세 여자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악마와 천사요?”
현수씨는 떨리는 손으로 잔을 채우며 규식씨를 슬쩍 바라보았다.
눈을 질끈 감은 규식 씨는 이미 56년 전 그 지옥 속에 다시 빠진 듯했다.
유튜브 https://youtu.be/o3a8y1H5ABY?si=8BVhElDuwbnicPHb 에서 감상하세요.
(핸들 : @꽃할배청춘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