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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의 개발 기간이 숨 가쁘게 지나갔다. 로보코어 연구동 지하 테스트룸에는 CB-001이 처음으로 작동을 시작했다. 외형은 SR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부는 완전히 달랐다. 4층 맥락 처리 시스템과 감정 분석 엔진 그리고 대화 메모리가 탑재되어 있었다.
첫 번째 테스트는 시뮬레이션 환경에서 진행되었다. 가상의 노인과 CB-001의 대화였다. 한수진 박사와 연구팀은 관찰실에서 모든 데이터를 모니터링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CB입니다."
CB-001의 목소리는 SR과 달랐다. 기계적 정확함 대신 부드러운 억양이 있었다. 음성 합성 엔진이 상대방의 연령과 상태를 고려해 톤을 조정한 것이다.
가상 노인이 대답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는 시뮬레이션이 진행되었다. SR이라면 정해진 대기 시간 후 다시 인사를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CB-001은 달랐다. 17초간 침묵을 유지한 후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날씨가 좋네요. 구름이 양 떼 같아요."
정현우가 데이터를 확인했다. CB-001은 가상 노인의 시선 방향과 창밖 날씨 정보를 종합해 대화 주제를 선택했다. 강요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대화 시작이었다.
다음 테스트는 더 복잡했다. 가상 노인이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시나리오였다. CB-001의 센서가 즉시 반응했다. 눈물의 화학 성분 분석과 호흡 패턴 측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CB-001은 바로 개입하지 않았다. 23초를 기다렸다.
박재현이 의아해했다. 왜 바로 위로하지 않는 것일까? 데이터를 분석하자 답이 나왔다. CB-001은 눈물의 종류를 구분하고 있었다. 슬픔의 눈물인지 안도의 눈물인지 분노의 눈물인지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슬픔으로 판단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힘드신가 봐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단순하지만 적절한 반응이었다. 과도한 위로도 차가운 무시도 아닌 적정한 거리의 공감이었다.
한 박사가 마지막 테스트를 지시했다. 가장 어려운 시나리오였다. 가상 노인이 죽은 배우자를 살아있는 것처럼 말하는 상황이었다. 치매 환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우리 영감이 오늘 늦네. 저녁도 안 먹고 어디 갔을까."
SR이라면 사실을 바로 정정했을 것이다. 배우자가 3개월 전에 사망했다는 데이터가 있으니까. 하지만 CB-001은 2.7초간 연산을 수행했다. 그리고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걱정되시겠어요. 영감님 평소에 어디 자주 가시던가요?"
한 박사가 미소를 지었다. CB-001이 선택한 것은 현실 부정도 거짓 동조도 아니었다. 대화를 자연스럽게 과거의 추억으로 이끄는 전략이었다. 치매 환자의 혼란을 줄이면서도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테스트가 끝나고 팀원들이 모였다. CB-001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적응적 자율성'이었다. 매뉴얼에 없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판단하고 대응했다. SR이 0.7초 동안 우연히 했던 선택을 CB-001은 의도적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정현우가 한 가지 특이한 데이터를 발견했다. CB-001의 프로세서 사용률이 대화 중 평균 67%를 유지했다. 하지만 침묵하는 동안에도 45%가 작동하고 있었다. 분석 결과 CB-001은 침묵 중에도 상대방을 관찰하고 다음 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경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부터 실제 필드 테스트가 시작된다. 서울 북부 요양원의 김 할머니가 CB-001의 첫 번째 실제 대상자가 될 것이다. 시뮬레이션과 현실은 다를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 박사는 CB-001의 메모리에 마지막 조정을 가했다. 김 할머니의 기본 정보와 선호도를 입력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CB-001이 할머니의 첫마디를 어떻게 들을지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침묵을 어떻게 읽어낼지가 더 중요했다.
연구팀은 마침내 CB-001을 승인했다. 다음날 오전 10시 김 할머니와의 첫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CB-001은 충전 스테이션에서 대기 중이었다. 센서는 슬립 모드였지만 메모리는 내일 만날 할머니를 위한 첫인사를 수천 번 시뮬레이션하느라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