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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Jun 18. 2021

엔리코 카사로사의 <루카>

알을 깨고 나오는 자와 밀어줄 수 있는 자에 관하여.

영화 <루카>를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줄 안다는 것


바다 괴물 알베르토와 루카

자신이 있는 곳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머무는 사람이 있고, 그 경계를 넘어 한 발짝 더 나아가 보는 사람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이고 보다 나은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정해진 범위를 넘어 다른 세상으로 들어감으로써 겪게 되는 다양한 경험들이 나를 성장시킨다고 생각한다. <루카 (2021)> 속 루카가 생애 처음으로 바닷속을 넘어 땅 위 세상으로 올라왔을 때, 그는 한 단계 더 성장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런 것처럼, 나 또한 스스로 울타리를 넘어온 적은 없는 것 같다. 항상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줬고 난 그들 덕에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루카 역시 먼저 육지 세상을 경험하던 알베르토의 손을 잡고 해변으로 올라왔고, 그렇게 그들은 함께 더 큰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싱클레어와 데미안


인간으로 사는 법을 터득해가는 두 소년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의 <루카>를 보며 들었던 생각은 왠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1919)>이 겹쳐 보인다는 것이었다. <데미안> 속 싱클레어는 유년기 안정적이고 순수하던 자신의 세계에 프란츠 크로머라는 어두운 세계가 들어왔음을 느낀다. 두 세계 사이에서 혼란을 겪던 싱클레어는 괴로워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렇게 성숙하고 성장해간다.


싱클레어의 진보를 도와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데미안이다. 그는 싱클레어에게 인생의 가치관, 비판 의식, 내면의 것을 인지하는 법 등을 일러주며, 크로머와는 다른 방향을 제시해준다. 루카 역시 그렇다. 알베르토의 손을 잡고 지상으로 올라왔고, 그의 발걸음을 따라 꿈을 꾸고 큰 목표를 갖는다.


알베르토는 바닷속에서는 볼 수 없던 세상을 보여주고, 수영하는 법을 넘어 걷는 법을 가르쳐준다. 스쿠터 '베스파'만 있으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도 알려준다. 한정된 세상 안에 갇혀 있던 루카는 형 알베르토의 자유 의지를 동경했다.


깨져가는 나를 인도했던 자의 세계


한동안 열중하던 스쿠터 만들기

이렇게 알베르토는 루카가 꿈꾸는 세계의 전부였다. 그의 말대로 하고, 그를 따라가면 뭐든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점점 성숙해져 간다. 해변 마을에 사는 인간 소녀 줄리아의 등장은 루카를 또다시 더 큰 세상으로 인도한다. 루카에게 알베르토는 한때 하늘에 떠있는 반짝거리는 것들은 물고기라며 물 밖 세상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존재였지만, 땅 위의 세상이 점차 익숙해지고 줄리아가 전해주는 지식들을 알게 되자 그가 항상 정답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어느 날 피스토리우스라는 자를 만난다. 한동안 데미안을 만날 수 없었던 그는 피스토리우스의 생각과 말에 매료된다. 하지만 싱클레어 또한 성장했고, 피스토리우스를 향한 존경심은 점차 그 수준이 낮아지기 시작한다. 그가 공유하는 생각의 틀린 점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지금 말씀하시는 것, 그건 참 빌어먹게 골동품 냄새가 나네요!"


싱클레어의 말처럼 그는 피스토리우스를 절대적 인도자로 인정하는 것을 멈췄고 어느덧 그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상에서는 골동품 냄새가 났다. 그는 과거를 향한 구도자였다. 그는 낭만주의자였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깊이 느끼게 되었다. 피스토리우스는, 그가 나에게 준 것을 그 자신에게는 줄 수 없었으며 내 눈에 비쳤던 그의 모습도 그의 실체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는 길잡이인 자신도 넘어서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길로 나를 인도했던 것이다.


루카는 알베르토의 손을 잡고 인간 세상으로 나왔고, 그로 인해 더 큰 꿈을 꿨다. 그에게 알베르토는 자유로운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알베르토는 루카의 방향을 완벽하게 제시해줄 수 없는 존재였다. 이건 알베르토가 아닌 그 누구도 한 개인의 의지를 재단해주진 못한다. 알베르토 역시 하염없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 소년일 뿐이다. 루카의 꿈은 알베르토와 '베스파'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 것이었지만, 이젠 아니다. 그는 학교에 가 배우고 싶었다.


알에서 나오려 투쟁하는 자


알베르토를 따라 젤라토를 처음 맛본 루카

루카는 바닷속에서 물고기들을 기르며 살아가는 일을 뒤로하고 한계에 묶이지 않는 소년이다. 알베르토를 따라 스쿠터 만들기에 열중하기도 하고 줄리아를 따라 이 해변 도시보다 더 큰 도시로 가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하기도 한다. 밤하늘에 떠있는 것이 물고기가 아닌 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 사실에 열광하며 천문학 책에 빠져들기도 한다. 루카가 바라보는 곳과 그의 청사진을 담기에 바닷속은 너무 좁은 곳이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빠져들었던 문장처럼, 루카는 그의 세계를 깨고 날아갈 준비를 한다.


아직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평생 그 누구도 완전해질 수 없기에 때때론 마음속 브루노가 고개를 든다. 나의 한 발짝을 겁먹게 하고 억제시키기도 하는 브루노. 하지만 내가 그 브루노를 조용히 시키고 용기를 내면 낼 수록, 브루노가 고개를 드는 빈도는 점점 낮아질 것이다.


밀어줄 수 있는 자


루카를 성장시키는 줄리아와 알베르토

내 인생의 방향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정해줄 수 없다. 하지만 내 선택을 믿어주고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는 사람은 정말 큰 힘이 된다. 그들은 내면의 안정을 주고 그 믿음은 용기가 될 것이다.


줄리아는 루카에게 너도 배울 수 있다는 확신을 줬고, 알베르토는 그의 꿈이기도 했던 '베스파'를 단념하고 루카를 지지해준다. 정확히 표현이 되지는 않지만, 알베르토는 학교를 향한 루카의 열망이 그 어떤 것보다도 컸음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고집도 생기고 나를 예전만큼 동경하지 않는 루카이지만, 어떤 부분에선 나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이기도 하는 루카이지만, 알베르토는 그런 그를 마냥 질투하는 소년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의 진심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고 이를 누구보다 밀어줄 수 있는 자였다.


<시네마 천국 (1988)>에서 토토를 보내던 알베르토처럼, <싱 스트리트 (2016)>에서 코너의 꿈을 누구보다 지지하며 더 큰 세상으로 보내던 형 브렌든처럼, 그렇게 알베르토는 루카를 지금보다 더 큰 세상으로 또 한 번 보내줬다. 제노바로 떠나는 기차를 보며 환호하던 알베르토를 보며 괜스레 눈물이 났다. 루카를 학교로 보내는 데 쓴 돈은 그의 오랜 꿈이기도 했던 '베스파'를 살 돈이기도 했다. 내 꿈을 미뤄두고 다른 이의 열망을 채워주기 위해 나의 것을 내어주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알베르토는 자신만큼 루카를 아끼기 때문일 것이다.


잊어서는 안 된다


루카와 알베르토

영화는 루카가 줄리아와 함께 학교로 떠나며 끝난다. 루카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의 그와 지금의 그를 만들어준 사람들을 말이다. 그를 밀어준 알베르토, 줄리아, 처음으로 바다 괴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깬 어른인 줄리아의 아버지, 그의 꿈을 이해하고 응원해주는 부모님. 루카에게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더 많은 것을 배움으로써 이 사람들의 생각은 틀리고 낡았음을 깨닫게 되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때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로의 지지와 이해를 기억하고 있는 순간,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루카는 모든 순간 알베르토와 함께였기 때문에, 그를 떼어내고 다시 한번 길을 떠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알베르토는 그런 그에게 언제나 자신이 곁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데미안은 이제 싱클레어를 떠나며 이렇게 말한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어쩌면 다시 한번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게 맞서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 넌 네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듣겠니?

나와 <루카>


2019년 8월 이탈리아 소렌토에서

마냥 학교라는 공간에 있을 것 같던 나에게도 이제 그 품을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스무 살 이후 대학에서, 군대에서,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그 안에서 난 꿈을 꿨지만 이제는 내가 어떤 단체에 들어갈 것이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하나하나 정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루카처럼 지금 있는 곳에 안주하지 않고 더 넓은 곳으로 나갈 것이다. 알을 깨는 투쟁을 할 것이다. 이런 내 계획을 말할 때마다 나에겐 알베르토 같은 사람들이 많다. 넌 충분히 나갈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는 말, 네가 무슨 길을 가던 나는 그저 뒤에서 응원해줄 뿐이라는 말들은 오늘도 한발 한발 나아가 보려 하는 나에게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준다. 언제라도 이들의 지지를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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