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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Jan 29. 2022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어나더 라운드>

실존주의: 각자의 삶을 가득 채우는 가치에 관하여.

유럽 영화만의 그 느낌


71회 칸 영화제의 포스터에 사용되었던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1965)> 중

엄청난 자본을 바탕으로 한 미국 영화와 다르게 대서양 건너편의 유럽 영화는 그곳만의 색깔이 묻어있는 경우가 많다. <자전거 도둑 (1948)>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영화감독 비토리아 데 시카의 '네오리얼리즘 (Neorealismo)' 혹은, 프랑스 영화계에 큰 바람을 몰고 왔던 장 뤽 고다르가 보여준 '누벨바그 (Nouvelle Vague)' 양식 등 유럽에서는 거대 자본과는 대척점에 있는 영화가 많았다. 혹자는 미국만큼의 자본이 영화 산업으로 유입되지 못한 결과라고 하기도 하지만, 현재에 와서는 이러한 특징이 유럽 영화를 대표하는 특성이 되기도 하였다.


69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1997)>,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의 <어 퍼펙트 데이 (2015)>,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 (2015)> 그리고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 (2011)>과 <소년 아메드 (2019)> 등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벨기에 등 유럽의 영화들은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고 화려한 볼거리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인물의 내면이나 사회 문제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유독 많다.


뭔가 좀 드라이한 느낌이라고 할까? 대체적으로 1시간 30분 정도의 짧은 러닝타임을 유지하면서, 자극적인 장면보다는 유럽의 일상적인 장면이, 여러 효과음보다는 배우의 목소리와 현장의 배경 소리가 채워지는 유럽 영화의 스타일은 이제 저예산 영화보다는 확장되고 마스터피스에 가까운 독립 영화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끔 한다. 이는 간혹 일본의 영화들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덴마크, 매즈 미켈슨, <어나더 라운드 (Druk)>


2016년 8월 4일의 덴마크 코펜하겐 뉘하운 운하

'혈중 알코올 농도 0.05%, 약간만 취하면 인생은 축제다.'라는 주제와 함께 진행되는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어나더 라운드 (2020)>는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고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세자르 시상식에서 수상을 하기도 하였다.


덴마크의 깔끔하고 맑은 풍경, 탁월한 이야기 구성, 군더더기 없는 편집 등 <어나더 라운드>는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다. 더불어, 이동진 평론가의 글처럼, 주연 배우 매즈 미켈슨 (Mads Mikkelsen)의 뛰어난 연기는 영화의 수준을 한층 더 높였다. 우수에 찬 듯한 눈, 이른바 '퇴폐미'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매즈 미켈슨은 이 영화에서 그의 모든 능력을 쏟아부은 느낌이다. 덕분에 영화관에서 오랜만에 배우의 연기에 깊게 몰입해 본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를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실존주의: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어나더 라운드>는 서양 철학자의 중요한 사조 중 하나인 실존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되기도 한다.

젊음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먼저 존재해버린 실존이 앞선 자들이다. 앉기 위해 만들어진 의자나 편히 누워 자기 위해 만들어진 침대와 달리 우리는 특정한 목적이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이다. 앞서 물체들의 목적에 해당되는 그 '본질'을 찾기 위해 우린 삶의 투쟁을 계속한다. 탄생과 죽음만이 있는 긴 선 상에서 우린 과정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이렇게 분투한다는 실존주의적 사상은 인간에게 선택과 가치의 중요성을 알렸다. 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의 삶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인간은 자유라는 저주를 받았다. 세계에 내던져진 이상, 인간은 그가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책임이라는 무거운 추가 항상 동반되긴 하지만, 어떻든 각자의 삶에 각자만의 의미를 부여해 본질을 구성해간다는 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오로지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무기력함


삶의 권태 한가운데에 있던 마틴

주인공 마틴은 의욕이 사라지고 일상의 지루함만이 남은 인물이다. 젊었을 때는 그의 뛰어난 학문적 성과로 교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먼 옛날의 이야기로 남았고, 그저 시끄럽고 말 안 듣는 학생들 앞에 선 평범한 고등학교 역사 선생에 지나지 않는 마틴은 집안에서도 그의 아내에게서, 아이들에게 재미없는 남편이자 아버지일 뿐이다. 말 그대로 그는 재미없는 인물이자, 그의 삶의 내용도 재미가 없다.


왜 살아가야 하는가? 철학은 이 문제에 여러 답을 내놓았지만, 어느 것도 확실한 정답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일상 속 평범한 우리는 때때로 이 질문에 여전히 부딪히고 있다. 마틴의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는 그 결과물이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저서 <시지프 신화 (1942)>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술! 정적인 상태를 바꿔줄 수 있는


고등학교 졸업 파티의 마틴

매일매일을 똑같은 그 지루함 속에 살던 네 명의 친구들은 한 노르웨이 철학자의 주장에 꽂힌다. 스콜데루드라는 철학자는 인간은 본래 체내의 알코올 정도가 0.05% 모자라게 태어났기 때문에, 의도적인 음주를 통해 이 정도를 메꿔준다면 인생이 축제의 연속이 된다는 것이다. 운전을 해야 해서 소다를 달라던 마틴은 이 말에 혹한다. 누구보다 이 상황을 탈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저명한 정치인, 철학자, 작가들을 언급하며, 음주에 대한 예찬을 이어간다. 윈스턴 처칠은 애주가, 애연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닐 정도로 술을 좋아했으며, '아침 식사 전에만 술을 마시지 않는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술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그의 대부분의 글들을 술에 취해 썼다. 네 명의 친구들은 술을 마시면 그들처럼 대담한 결정이나 예민한 감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술은 정상 상태의 인간에게는 없는 힘을 주는가? 이들의 실험은 차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고서의 1장에서 3장으로 갈수록 허용 범위가 늘어나고 있었다.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삶


체육교사이던 톰뮈가 코치하던 유소년 축구팀

술과 함께 하는 실험을 진행하면서, 네 명의 친구들 다 주변인들에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들을 보이게 된다.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가슴속에 묻혀있던 것들이 고개를 들기도 하면서 이들의 행동은 점점 과감해진다. 특별할 것 없던 그들의 일상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문제는 단점 또한 극명하다는 것이다. 술은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적당히'라는 기준을 흩트려놓곤 한다. 마틴과 친구들은 난동을 피우고, 침대에 오줌을 싸기도 하며, 얼굴에 상처를 입은 줄도 모르고 길에 쓰러져 잠들곤 했으나, 어느 순간 자신들의 행동이 과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문제는 톰뮈였다. 가족도 없고, 늙은 개 한 마리와 살던 톰뮈는 다시 예전처럼 술이 없었던 삶으로 돌아가 보려 하지만, 그에게 이건 너무 쉽지 않았다. 교직원 회의에서 난동을 피우고 학교로 돌아가기도 힘들어지자, 그는 술과 함께 삶의 깊은 구덩이로 떨어진다. 다른 친구들은 하나둘씩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음에 많은 좌절감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친구 마틴에게 전한 마지막 말은 "이건 가치가 없어."였다.


톰뮈는 불안 불안했다. 그가 결국 취해서 물에 빠져 사망한 것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톰뮈는 누구보다 의미 있는 가치를 자신의 삶에 채워가고 있었다. 또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꼬마를 더 관심을 가지고 지도해 유년기에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으며, 병들어가던 강아지 한 마리를 최선을 다하며 보살피기도 하지 않았는가.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의 제2부 '춤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나 춤이 끝나고 소녀들이 가버리자 그는 마음이 슬퍼졌다. "해는 벌써 졌구나."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풀밭은 눅눅해지고 숲에서는 냉기가 몰려오는구나. 미지의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깊은 생각에 잠겨 바라보고 있다. 도대체! 그대는 아직도 살아 있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아, 벗들이여, 나의 내면에서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저녁이다.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저녁이 되었다. 저녁이 된 것을 용서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삶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마틴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누구보다 건실하고 올바르게 살아온 것 같던 지도자가 사실은 처칠도,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음을 말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 삶의 결과를 알 수 없기에, 슬픔에 빠진 회의를 느낄 것도, 지나간 과거를 질책할 것도 없다.


삶이란 한바탕 쏟아졌다 어느새 지나가는 비와 같은 것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간 후

톰뮈는 세상을 떠나고, 셋만 남았다. 하지만 아내와 깊은 갈등을 겪던 마틴도 다시 나아진 상태로 돌아가고 있으며, 술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살자는 다짐을 하기도 하며 이들은 순간의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삶이란, 한바탕 쏟아졌다 어느새 지나가는 비와 같은 것. 폭풍 속에서 "큰일났다, 큰일났다" 말하다가도 지나고 나면 다시 개인 하늘 보며 새롭게 웃어보는.

-이해인 <비 오는 날에 4>


삶은 흐른다. 모든 것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가르침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닫힌 방 (1944)> 속 이네스의 말, '우리는 언제나 너무 일찍 죽죠, 혹은 너무 늦게 죽거나. 하지만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거예요. 줄은 그어졌고, 이제 결산을 해야 해요. 당신은 당신 인생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처럼, 삶이 너무 버겁다고 느껴질 땐, 우린 시작과 끝만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는 삶에 대한 예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끝과 시작, 재즈 발레


술이 아닌 삶이 축제다

마틴은 바닷가 앞 고등학교의 졸업 파티 무리 안에서 재즈 발레를 춘다. 술을 어느 정도 마신 건지 알코올 수치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내와 다시 한번 잘해볼 수 있다고 해서 여생을 계속 좋은 상태로 함께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헹가레에 신나 하던 친구가 늘 그렇게 밝은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우리만의 본질을 채워나가는 것이며, 끝없이 '다시 한번'을 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삐끗했어도 다시 한번.


그대들이 일찍이 어떤 한순간을 향해 "다시 한번!"하고 원한 적이 있다면, 그대가 일찍이 "너는 내 마음에 드는구나,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이 된다!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실로 꿰어져 있고, 사랑을 엮여 있는 그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 아, 그대들은. 그대 영원한 자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하라.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인지 마틴의 무아지경에 가까운 재즈 발레는 마음을 울렸다.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추는 그 움직임은 매즈 미켈슨의 뛰어난 연기와 함께,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완성도를 한 층 더 올린 장면이 되었다. 그의 춤과 바다로의 다이빙은 그의 과거에 대한 연민과, 애환과, 친구에 대한 추모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칠해져 있었다.


<어나더 라운드>는 술에 대한 영화이지만, 술이 미친 좋은 영향도, 나쁜 영향도 말하지 않는다. 술 때문에 발생한 사고와 동시에, 술의 힘을 빌려 시험을 통과하고 의과대학에 합격한 학생의 이야기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신 여기에는 삶에 대한 예찬이 녹아져 있으며,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 실존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긴 여정 중 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저 인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를 지고 걸어가던 낙타의 존재에서, '너는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만난 용에게 '나는 원한다.'라며 반항하는 순간 사자가 된 존재가, 다시 한번 태초의 유희이자, 삶을 즐길 줄 아는 아이로 가는 여정을 설명한 니체의 말처럼, 마틴은 적어도 전보다 뚜렷한 목적의식은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더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민망함에 춤 추기를 거부했던 그이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마틴이 추는 재즈 발레는 또 다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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