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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Jan 10. 2022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

현대인의 무기력함과 파괴 욕망에 관하여.

T. S. 엘리엇의 <황무지> 속 시빌


엘리후 베더의 <The Cumaean Sibyl (1876)>

20세기 초반,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혼란으로 가득했다.  차례의 대규모 전쟁과 경제 위기, 전염병의 창궐  지구 어느 곳도 안정된 곳은 없는  같았다. 영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인 T. S. 엘리엇은 1922 출간한 그의 대표작 <황무지 (1922)>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어와 희랍어로   에피그라프는  전체의 주제를 담고 있다.


“Nam Sibyllam quidem Cumis ego ipse oculis meis vidi in ampulla pendere, et cum illi pueri dicerent: Σίβνλλα τί ϴέλεις; respondebat illa: άπο ϴανεΐν ϴέλω.”

'나는 쿠마의 시빌이 항아리 속에서 흔들리는 것을 내 자신의 눈으로 똑바로 보았다. 아이들이 말했다. "시빌, 원하는 게 뭐야?" "나는 죽고 싶어."'


T. 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화가 된 유럽 사회를 묘사하는 한편, '불모성'과 같이 희망을 잃고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을 표현했다. "나는 죽고 싶어."라는 말과 함께 그는 '근근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습성에 주목하는데, 이는 더 이상 새싹의 돋움, 새로운 생산, 의지를 동반한 창작 욕망이 현대 사회에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 속 트래비스 비클


트래비스 비클 (로버트 드 니로)

트래비스 비클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 (1976)>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그 역시 방황하는 현대인을 보여준다. 트래비스 비클은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인 미 해병대 출신의 택시 운전사다. 그 역시 근근이 뉴욕에서 일하며 소소한 돈벌이를 해가던 중 지속되는 불면증과 우울감에 극도의 피로를 느끼기 시작하고 이는 사회에 대한 극단적 저항으로 표출된다.


현대에선 대다수의 사람들이 뚜렷한 성과를 이루기 힘들다. 무색무취의 사회에서 노력의 '상징'일뿐인 '돈'을 버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보상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트래비스 비클은 본인도 온전하지 못함에도 사회의 악을 자진해서 막으려 한다. 뉴욕 뒷골목의 어린 매춘부 아이리스를 구하겠다며 현장을 덮쳐 갱단 일원들을 권총으로 살해한다. 과연 그는 진정으로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살인을 했을까? 총격전 끝에 본인 또한 부상을 입은 트래비스는 뒤늦게 도착한 경찰들을 바라보며 피 묻은 손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며 상징적 자살을 묘사한다.


현대인의 무기력함


Edvard Munch <Anxiety (1894)>, <Self Portrait, The Night Wanderer (1924)>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는 우울, 고독함 등을 주제로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위의 두 그림 <불안 (1894)>과 <밤의 방랑자 (1924)>는 그의 대표작 <절규 (1893)>과 더불어 우울함과 어두움을 잘 보여준다. 군중 속에 있어도, 홀로 있어도 끝없이 무기력함을 느끼며 여러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현대인의 특성은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발현되게 되었을까?


데이비드 핀처 감독 역시 그의 영화 <파이트 클럽 (1999)>에서 무기력한 한 남자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에드워드 노튼)은 평범한 직장인이다. 일 외에는 자신의 집에 이케아 가구를 모으는 것이 유일한 할 거리라 말하는 그는 오랜 기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맨 그는 하루하루를 무표정을 짓고 살아간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도 않으며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간다. 내일도 이럴 것이라는 뻔한 예상과 함께. 반복되는 굴레의 아래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는 그는 자신을 치유해줄 수 있는 여러 모임에 참가하는데, 이는 결국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더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우린 목적을 상실한 역사의 고아다


내레이터이자 타일러 더든(Tyler Durden)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파이트 클럽>은 '우린 목적을 상실한 역사의 고아다. 2차 세계대전도, 경제 공황도 안 겪었지만 대신 정신적 공황에 고통받고 있다.'라는 문장에 그 닻을 내리고 있다. 자본주의의 확립과 더불어 생기게 된 무한 경쟁, 습관적 타인과의 비교, 열등감, 끊임없는 자기 계발의 내면적 요구... 셀 수 없이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현대에 등장했고, 어떤 심리학자는 우울증이 비교적 최근에 생긴 병이라고 보기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의 우울증에 관해 그의 저서 <에로스의 종말 (2012)>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죄(채무)를 만들기만 할 뿐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 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파산 (Insolvenz)이란 말 그대로 채무 상환 (solvere)이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의 내면에는 참고 참은 묵은 분노와 짜증이 가득 차 있다. 언젠간 역류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채워져 있었고, 주인공은 이를 '타일러 더든'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면에서 만들어 내 방출해낸다.


본래의 모습 VS 만들어진 나


주인공에게만 보이던 허상의 '타일러 더든 (브래드 피트)'

주인공은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 그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잠들어있는 폭력적 성향은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고,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빨리빨리하라며 다그치던 상사에게 물리적 위협을 받고 싶지 않으면 가만있으라 하는 등 그는 이제 전혀 사회화되지 않은 내면의 날 것 그대로 삶을 살기 시작한다. '파이트 클럽 (Fight Club)'을 만들어 도시 곳곳에서 억누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만들기도 한다.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개개인의 성향이나 특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들이 속해있는 집단에 맞춰 일상을 보낸다. 이는 '사회화', '예의', '매너'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는 네오리얼리즘 (Neorealismo)으로 잘 알려진 감독이다. 네오리얼리즘은 가장 현실적인 것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던 양식이며, 그렇기에 가감 없이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던 영화 스타일이기도 하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당신은 단지 당신이 하는 일 속에서만 존재한다.


자신의 일에 실증을 느끼고, 다른 인간이 되고자 한 주인공은 자신의 다른 자아를 불러와 집에 불을 낸다. 이로써 그는 사회의 기성품과 같이 만들어진 자신과 날 것 그대로의 자신과의 마찰을 맞이한다. 사무실이 아닌 교외의 허름한 집에서 자신을 표현하며, 깊은 곳에 있던 반골(反骨) 기질을 마음껏 펼친다.


새롭게 태어나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주인공

이동진 평론가는 인간의 캘린더 문화를 설명하며, 우리가 매년 1월 1일을 맞이하거나 생일을 축하할 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과정에 관해 말했다.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입으로 불어 끄기 전 우리는 상징적 죽음을 어둠으로 표현하며, 촛불이 꺼지며 순간의 죽음을 맞이하였다가, 다시 방의 불을 켜면서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행위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 또한 길거리에서 새로운 '나'인 '타일러 더든'에게 맞으며 새로 태어난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 (2009)> 속 태주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 상현에게 의도적으로 물림으로써 그와 같은 뱀파이어가 된다. 뱀파이어가 되면 그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통해 현재의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와 피가 섞이며 뱀파이어가 되어가는 태주를 보며 상현은 말한다.

해피 벌스데이, 태주 씨.


주인공은 자신이 타일러 더든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처럼 남들에게도 그와 같은 '터닝 포인트'를 제공하고자 한다. 강도로 위장해 급습한 편의점에선 아르바이트생에게 권총으로 위협하며, "뭐가 되고 싶었냐"라고 묻는다. 두려움에 떠는 청년은 '수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학교로 돌아가긴 싫다'라고 말한다. 공부가 하기는 싫다는 것이다. 그러자 타일러 더든은 당장 집에 가서 생물 공부를 마치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친다. 타일러는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줬노라 말한다.


'직업이 다가 아니야. 돈도 다가 아니야. 무슨 차를 타는지, 지갑이 얼마자 두둑한지, 그딴 건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타일러의 말에 주인공은 다시 한번 깨어나지만, 동시에 파멸의 길로 들어가고 있기도 했다.


문제점: 끝을 모르는 타나토스 (Thanatos)와 끝을 모르는 자유


타일러 더든은 선량한 목적을 지니고 정의를 구현하는 인물인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의 파괴적 행위가 끝을 모른 채 질주하기 때문이다. '파이트 클럽'의 확장과 함께 도시는 폭력과 테러로 물들기 시작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문명과 인간의 발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명은 타나토스 (Thanatos)와 에로스 (Eros)가 반복되는 것이다.

파괴와 죽음을 상징하는 타나토스가 있는 한편, 이를 회복시킬 사랑과 새로운 삶의 탄생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폭력과 파괴에 익숙해진 주인공은 여기서 빠져나오는 길 마저 까먹은 듯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끝없는 자유를 누리던 주인공은 이제 그러한 삶에도 지겨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타일러 더든에 실증을 느끼기도 하며, 그 집에서 나오고자 한다.


해결책: 에로스 (Eros)


말라 싱어 (헬레나 본햄 카터)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이 억눌러있던 사회 속 자아를 '타일러 더든'의 손을 잡고 분출해냈다면, '말라 싱어'는 이를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다. '관객도 모르게 필름은 교체되고 영화는 계속되는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과거 영화 필름을 편집하던 방식을 설명하던 타일러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집중해서 인지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흐름에 변화를 가져올 요소들이 개입해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음을 설명한다.


말라 싱어는 주인공이 다른 자아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그와 사랑을 나누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있었기에 타일러는 파괴로 점철된 그의 삶에 한 방울의 에로스를 담을 수 있었다. 철학자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에서 에로스와 우울증의 상관관계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성과 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신을 가져다준다. 이때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긴 채 주체의 에고를 확인해주는 거울로 전락한다. (...)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사랑의 주체는 특별한 약화의 과정 속에 붙들리지만, 이러한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물론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

멋있는 영화, <파이트 클럽 (Fight Club)>!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엔딩

내가 알지 못한 영화 속 숨겨진 철학적 요소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두 번째 보았을 때 더 많은 것이 느껴진 영화였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깊게 자리 잡은 철학을 스타일리시한 영상 안에 잘 녹여낼 줄 아는 감독이다. 그의 작품들은 무게가 있는 드라마다. 그리고 <파이트 클럽>은 특히 그의 멋이 잘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자체가 멋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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