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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Dec 24. 2021

로버트 레드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음에 관하여.

잔잔함의 가치


영화의 핵심이 되는 플라이 낚시

우리의 삶에서 극적인 순간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얼마나 크고 자극적인 높이의 것들을 넘게 될까? '이건 책으로 써둬야 해.'라고 할 만큼의 거대한 일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 강력한 자극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반대의 개념일 수 있는 잔잔함과 은은함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앞으로의 삶은 대부분이 그런 것들일 테니.


여러 영화를 보다 보면 고맙게도 이런 잔잔함을 묵묵히 보여주는 작품들이 꽤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 (2014)>,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 (2008)>,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 (1988)>,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 (2018)>등이 떠오른다. 극적인 사건이 영화의 줄거리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며, 그런 사건이 등장한다고 해도 인물을 크게 덮칠 정도는 아니다.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흐르는 강물처럼 (1992)>또한 이들과 같았다. 정말 조용히 흐르고 흐르는 강물을 보여줬다. 저항하지 않고 순리대로 흘려보내는, 그러한 관조적 태도가 이 영화의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와 쟤


아버지 맥클레인과 두 아들

큰 아들 노먼 맥클레인과 작은 아들 폴 맥클레인은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둘은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기에 비슷한 유년기를 같은 추억을 공유하면서 보내왔다. 하지만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은 분명 존재하기에, 큰 간극을 보여준다. 형인 노먼은 안정적이고 차분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동생 폴은 그보다는 모험을 즐기고 불확실성에도 뛰어드고 보는 성향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동생 폴은 노먼에게 있어 너무나 다른 사람이지만, 동시에 한때는 동경하던 존재하던 존재이기도 하다. 자신에게는 없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폭포로 뛰어들 줄 아는 용기와 열정을 가진 존재이다. 이는 제시 번즈 또한 노먼에게 있어 그렇게 비친다. 그녀는 유일한 도로가 막히자 언제 올 지 모르는 기찻길로 올라가 운전해간다. 노먼은 그런 그녀를 경탄하듯 바라본다. 자신에겐 없는 그 무모함과 순간의 결단력. 지나치게 멀리 보지 않고 당장의 것에 집중하는 폴과 제시의 특성은 노먼에게 있어 아버지와는 다른 가르침을 준다.


노먼은 동생의 삶의 방식을 매우 가까이에서 지켜보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삶의 태도를 잃지는 않는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잔잔함을 아는 것, 아버지의 온화함을 닮은 그는 그만의 삶을 살아간다. 마지못해 폴을 따라 도박장 '롤로'에 들어갔던 노먼은 금세 자신의 신념과는 맞지 않기에 바로 나온다.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는 제시 번즈를 뜨겁게 사랑했지만, 그녀의 오빠가 문제였다. 그의 허세로 가득 찬 행동 또한 노먼의 신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노먼에게 폴은 흘러가듯 한 마디 한다. "어쩌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자신만의 나르시시즘을 형성해 살아간다. 삶에서 고유한 가치를 두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우린 그를 이해하진 못해도 그대로 바라봐줄 수는 있을 것이다.


물들인다는 것


형제가 각각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상징하던 보트 사건

노먼은 폴의 무엇이 신경 쓰였던 걸까? 거침없던 폴은 왜 노먼 앞에서 때론 눈치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것을 증명하려 하는 걸까? 외부적으로 이 형제는 서로의 삶의 방식에 대해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성장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이에게서 자극을 받기도 하고 다른 이를 통해 영감을 받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제를 그렇게 키워온 것이 느껴지고 또 그 부분이 좋게 느껴졌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자체로 사랑해줄 수 있으면 되는 것 같다. 폴은 한때 기자 생활을 하며 안정적으로 삶을 건설해나간 것 같기도 하지만 이내 도박에 빠지며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규칙을 깨고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지만, 은연중에 그는 이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가족들에게 또, 주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노먼이 그를 걱정할 때 폴은 이렇게 답했다. "내 빚이야, 형." 각자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저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만 놓지 않으면 된다는 두 형제 아버지의 뜻은 보는 이에게 따뜻한 울림을 주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물에서 자연스럽게 이 흐름을 따라가며 하는 플라잉 낚시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우리가 다른 이에게 어려울 것은 없다. 그저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흐르는 강물처럼 개개인과 서로에 관한 마음을 띄워놓으면 된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그 따스함이 오래가는 작품이다.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다'라고 말하는 형제의 아버지처럼 우리도 애쓰지 않고 흘러가는 흐름에 맡기고 살아가면 된다고 말을 전해주는 것 같다. 노먼은 명문대에 진학하고 이후에도 큰 어려움 없이 시카고 대학교라는 좋은 직장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우린 그와 같은 삶을 안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폴은 아니다. 몬태나주의 헬레나라는 도시에서 조그마한 신문사의 기자로 살아가지만, 플라잉 낚시를 사랑하고 삶의 모험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노먼보다는 안정됨이 결여되어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폴이 모자라고 잘못된 사람인가? 어쩌면 폴 맥클레인이야말로 몬태나의 흐르는 강물을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깊게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거기엔 섭리가 있고 순리가 있다. 정해진 길을 만들 필요도 없고 그걸 쫓을 필요도 없다. 말 그대로 흐르듯이, 수없이 많은 세월을 흘러온 이 강물처럼, 우리보다 큰 그것을 따라 힘줄 것 없이 타고 나아가면 된다. 내 옆의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사랑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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