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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Dec 16. 2021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

순전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서, 이 생각이 의미하는 바에 관하여.

2021년 11월, 영화


사람들과의 대화가 아니면, 기록으로 내 현 상황을 잘 남기지 않는다. 매일 일기를 쓰지만 그건 공개용이 아니니까 말이다. 글을 쓰며 오히려 감정을 풀어내는 게 아니라 더욱 빠져드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간혹 과거에 쓴 글을 보면 실제 그랬던 것보다 더 과장해서 내 기분을 쓴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이 시점은 나중에 나의 삶을 돌아볼 때도 기억에 남을 것 같아, 이번엔 글로 남겨두기로 했다. 나름 쌓아왔다고 생각했던 나의 지난날들이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시적인 것으로는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입학 이후 7년 간 몸담았던 인하대학교를 떠나야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 업무 경력이 전무해, 일을 구하려 보니 그동안 나 나름대로 바쁘게 살아온 것들은 이력서 내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더 흔적이 남는 일들을 했어야 했나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라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디 나가서 상을 받고, 그 과정을 수료했다는 증거물을 보여줘야 제대로 된 증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가장 큰 꿈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영화를 만들어 어디에 걸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영화를 봐왔는데, 이건 일을 구하는 데 있어서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그만큼의 영화를 보고, 그저 시간 때우기로 보는 것이 아니며, 하나하나 진심을 다해 보면서 여러 감정들을 느껴왔고 배워왔고, 그 소감을 글로 남겨두기도 한 그것들은 그들에겐 별로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어쩌면 영화를 보는 것이 지금의 나를 갉아먹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통해 인생의 방향성을 배운 적도 있고, 한 장면 한 장면을 곱씹고 감탄해보면서 나를 채워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때에는 이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이건 내가 예전에 그림 그리기를 멈췄던 까닭과 유사하다.


말만 이렇게 하고 영화를 아예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전보다 그 양이 현저히 줄긴 했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봐왔는데, 최근 영화관에서는 드니 빌뇌브의 <듄 (2021)>과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 (2021)>를 봤다. 하지만 두 영화 다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1월 23일 피터 패럴리 감독의 <그린 북 (2018)>을 봤던 CGV 신촌 아트레온에서 예전부터 기대하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프렌치 디스패치 (2021)>를 봤다. '이거지......'싶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벅차오름이었다. 그리고 내가 왜 그토록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오랜만에 상기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좋아한다. 이걸 옴니버스 식으로 엮고 엮어서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에 덧대어 당신들에게 보여주겠다.' 감독 웨스 앤더슨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웨스 앤더슨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프렌치 디스패치>


웨스 앤더슨

2014년 개봉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은 <다즐링 주식회사 (2007)>, <문라이즈 킹덤 (2012)>과 함께 웨스 앤더슨의 대표작이다. 지금까지도 소위 영상이 예쁜 영화를 말하면 항상 언급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이지만 나에겐 그게 전부였다. 호텔 내에서 벌어진 하나의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오히려 대칭과 카메라의 수평 움직임, 다채로운 색깔, 연극이 진행되는 듯한 구성 등의 요소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치 방문한 곳이 너무 멋있고 예뻐서 그것만 바라보다 옆에서 하는 소리들을 다 듣지 못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프렌치 디스패치>는 반대였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감독의 특징이자 차별점인 미적 요소가 주변에서 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줬다. 대사와 내레이션이 굉장히 많은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놓치지 않고 모두 보고 읽어낼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이야기와 시각적 요소의 비율을 잘 맞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부고: 짧은 가이드


'프렌치 디스패치'의 편집인 아서 주니어 (빌 머레이)

영화는 신문사 '프렌치 디스패치'의 마지막 발행본 내 여러 섹션을 옴니버스식으로 보여주며, 편집인의 사망과 이를 연결 짓고 있다. 기사의 순서대로 영화도 진행되기 때문에, 편집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가장 먼저 나온다. 신문사의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면서 과거 '피크닉'이라는 이름에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게 된 시점 등을 설명하던 내레이션을 따라 영화는 화면 비율을 조정한다. 하나의 세션을 설명할 때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비율로 전환되는 화면 비율은 빠르게 진행되는 영화의 속도를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는 좋은 장치였다.


죽음을 다룸에도 장래는 편집자장으로 한다는 말이나, 묘비명은 'no crying'으로 한다는 점, 그리고 편집인을 둘러싼 샛노란 색깔들은 극의 분위기를 뭔가 아이러니하게 만든다.


현대를 바라보는 웨스 앤더슨의 시선


세저락과 '프렌치 디스패치'의 직원들

본격적인 기사가 이어지기 전, 감독 웨스 앤더슨과 매우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배우 오언 윌슨이 짧게 등장하면서 프랑스의 가상 도시 '앙뉘'를 소개하는 에피소드가 먼저 등장한다. 자동차를 비판하고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에 따른 구역 분리 등을 언급하는 그는 현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꽃, 빵집, 맑은 하늘 등 마냥 아름다운 화면을 담고 싶어 하는 웨스 앤더슨의 마음이 투영된 것일까? 기자 세저락은 도시의 어두운 부분을 말하며 볼멘소리와 같은 말투로 그의 글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곧이어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그. 거부할 수 없이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다.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웨스 앤더슨의 시선


수감자이자 화가인 모세스 로젠탈러 (베니시오 델 토로)와 교도관이자 뮤즈인 시몬 (레아 세이두)

현대미술은 상징과 의미의 예술이다. 이제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능력과 기법으로 그림의 가치를 판단하는 시절은 과거가 되었다. 사진의 등장 이후 '잘 그린 그림'은 더 이상 매력이 없어졌다. 특유의 '느낌'이 가장 중요한 미술의 시대가 왔다. 웨스 앤더슨은 '발가벗은 시몬' 섹션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이를 풍자하는 듯했다. 수감번호 7524번 모세스 로젠탈러는 원래 화가가 아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수감된 그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를 본 줄리안 카다지오 (애드리언 브로디)의 눈에 띄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줄리안 카다지오가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긴 하지만, 좋은 그림에 대한 기준을 내려주는 절대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그의 미술적 시선에 모세스의 그림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로잡혔다.


예술가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인지, 예술 작품 속 의미를 생각할 때 이 사람의 의미는 값어치 있는 의미이고 저 사람의 의미는 왜 값어치 없는 의미인지, 비싼 그림이 좋은 그림인 것인지, 대중은 이를 이해해야 하는 건지 등 예술 그중 특히 현대미술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 어쨌건 모세스는 자신의 뮤즈인 시몬이 발가벗고 있는 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 안에 녹여냈다. 몇몇은 애매한 반응을 보인다. 더불어 그의 그림에 매료된 줄리안 카다지오는 그의 그림으로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데, 왜 벽에 프레스코화 형태로 그렸냐며 소리를 친다. 의미를 만들어내 팔고 싶었던 걸까, 진짜 그의 그림이 좋았던 걸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진보주의 운동을 바라보는 웨스 앤더슨의 시선


사회운동가 제피렐리 (티모시 샬라메)와 줄리엣 (리나 쿠드리)

대부분의 경우에 '진보' 매력적이다. 완벽한 시스템은 없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시스템은 없다. 이는 사회 체제로  시야를 좁히면 더욱 그렇다. 지금 나의 상태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진보에는 허점이 많다. 결국은 또다시 자신들의 욕심을 찾아 나서는 생각과 운동이며, 이는 다른 누구를 침범하는 움직임일 수도 있다. 침범당한 자들은 당연히 이를 거부한다. 충돌은 이렇게 발생한다. 웨스 앤더슨은 다음 섹션에서 과거 프랑스의 68 운동을 다루고 있다. 68 학생운동은 사실상 현대에서 가장 의미 있던 진보적 운동이다. 베트남전, 미국과 소련의 주도 아래 장기화된 , 사회문화적 구체제적인 보수주의의 고착화는 당시 젊은 세대에 전례 없던 분노를 몰고 왔다.  이상 기성세대에 복종하고 '전통'이라는 개념 아래 기존의 행태에 순응하지 않았다.


헤겔은 그의 이론에서 사회는 항상 점점 더 나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근대 두 차례의 세계대전, 강력한 힘으로 타인을 억압하는 헤게모니의 등장 등은 이 이론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에 불만이 쌓인 프랑스의 청년들은 1968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부를 습격하며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선언한다. 이데올로기를 뒤엎는 운동이 시작되었고, 프랑스 이외에도 수많은 나라들에 이 움직임이 퍼지기 시작했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체스판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시장과 학생 회장 제피렐리의 대립을 보여준다.


기존 세력의 힘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군입대, 우리의 분노를 보여주는 선언문의 한 글자 한 글자, 개정한다는 것에 대한 해석, 이 모든 것은 우린 당신과는 다른 세상을 지향한다는 학생들의 목소리다. 소등 이후 미치미치라는 청년에게 동기들이 "미치미치, 뭐가 되고 싶어?"라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항거자."


웨스 앤더슨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제피렐리와 줄리엣은 사회를 뒤집어엎을 것 같았지만, 그런 관점에서는 작다고 볼 수 있는 사랑과 함께 스쿠터를 타고 집회 현장을 떠났다. 한때 학생들의 집결지였던 상 블레그 카페는 점차 조용해져 간다. 자신이 쓴 선언문을 보여주던 제피렐리는 자신의 글을 비판하지 말고 감탄만 하라고 한다. 웨스 앤더슨은 치기 어린 한때의 움직임을 보여주려 한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저항의 목소리를 중계하던 제피렐리가 송신탑을 고치러 올라갔다가 감전사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진다.


기성세대인 루신다 크레멘츠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줄리엣에게 건네는 말인 사과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죽음 이후 영웅의 상징이 된 제피렐리의 이미지, 한때 파벌로 분열되기도 했지만 유토피아를 꿈꿨었다는 점 등을 보며 한 편으로는 이들의 움직임에 찬사를 보내는 것 같기도 하다. 영웅이 된 제피렐리 한 장의 사진은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는 미국 등 자본주의 소비문화와는 대척점에 서있던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모순적 이게도, 그의 이미지는 하나의 상품이 돼 미국에서 수많은 장식 속에 녹아져 있다. 웨스 앤더슨은 이 에피소드의 끝을 이렇게 내는 것 같았다. 본래의 의미가 어떻든, 결국 남는 건 이미지다.


맛과 냄새를 바라보는 웨스 앤더슨의 시선


요리사 네스카피에 경위 (스티브 박)

마지막 섹션은 '맛과 냄새'라는 제목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여러 장르가 녹아져 있는 에피소드이다. 그중 재밌었던 것은 경찰 조직에 대한 풍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요리만 하는 네스카피에라는 사람이 경위'씩'이나 된다는 점이다. 또한 그의 아들이 납치를 당했는데, 식사를 하며 작전을 짜는 경찰서장 (마티유 아말릭) 등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런 와중에 네스카피에가 독이 든 음식을 전략상 먹을 수밖에 없었고 사경을 헤매면서도 그 재료에는 '풍미가 있었다'며, "우린 외국인이니까요."라고 이어지는 장면이 특히 좋았다. 그의 말대로 '두고 온 걸 그리워하는' 외국인을 투영함으로써 웨스 앤더슨이 어린 시절 자주 보던 '더 뉴요커 (The New Yorker)'에 대한 그리움이 은근히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한 장면이었다.


연출 기법과 배우들


개인적으로 정말 잘 만들어진 포스터라고 생각한다.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가 특히 좋았던 것은 스토리라인 면에서도 그렇지만, 연출 기법에서도 그렇다. 그의 특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미적인 색채, 화면 비율, 배경의 균형 등과 더불어 이번에는 연극, 애니메이션, TV쇼 같은 요소들이 영화에 포함되며 더욱 다채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군인들이 훈련소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장면을 연극 세트로 표현하고, 경찰과 납치범의 추격전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것, 로벅 라이트가 쇼 호스트와 얘기를 나눌 땐 순간 토크쇼 같아 보이는 연출 기법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색다름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외에 흑백으로 이어지던 화면에서 쇼걸인 정키에게 눈 색깔을 보여달라고 하는 경찰서장의 아이에게 이를 응해주는 장면은 정말 멋있었다. 이는 극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정키를 연기한 시얼샤 로넌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 씬이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유명 배우들이 출연을 하는 데 저마다 딱 맞는 배역을 연기하고 있어 작품의 깊이는 더욱 깊어졌다.


초현실주의


'프렌치 디스패치' 본사

<프렌치 디스패치>는 현실을 기반으로 진행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상의 세계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실존하는 자신과 사람들, 물체를 그리지만 꿈속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풍기는 것과 같이 말이다. 마냥 가상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어딘지 애매한 분위기가 매력의 핵심이다.


옴니버스 영화는 무수히 많고, 미적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쓴 영화도 수없이 많다. 그런데 웨스 앤더슨은 어쩌면 흔한 그것들을 오로지 본인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냈다. 폴 누제는 1931년 초현실주의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평범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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