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전을 마주하고 있는 나에게.
그럼에도 내가 지금 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작년 9월 오래 준비하던 영국 리즈로 석사 유학을 왔다. 하고 싶고 가려고 하는 방향이 확고했던 나에게 있어 삶의 꼭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인가, 요즘은 내가 여기 왜 있는지도 쉽게 망각하곤 한다. 오기 전 생각했던 것, 원래의 목적과 조금씩 달라서 그런 것인지, 학교와 기숙사만 반복하는 일상에 질려서 그런 것인지 곧잘 까먹는다. 이것도 몇 년 전의 '나'는 진심으로 원하던 자리였는데 말이다.
강의, 개인 공부, 논문 준비, 취업 준비... 때로는 다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아예 손을 놓기도 할 정도로 나에겐 가끔 버겁게 느껴지는 일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한국에 두고 온 것들도 매일같이 생각나고 여기서 이겨내고 나가야만 하는 것들도 매일같이 생각나는 시기이다. 영국에 올 때 즈음, 쉽지 않을 도전인 걸 알았기에 마음을 다잡아 볼 방법 중 하나로 베넷 밀러의 <머니볼 (2011)>을 다시 보고 브런치에 글을 쓰려고 했었다. '새로운 도전을 마주하고 있는 나에게.' 소제목을 달아 임시 저장을 해둔지 약 반년이 흘렀다. '새로운 도전 속에 있는 나에게.'로 바꾸는 것이 맞나 싶지만 오늘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 보자는 의미에서 그대로 쓰기로 한다.
<머니볼>. 어느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다. 볼 때마다 잔잔한 위로와 한 번 더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는 의미 있는 메시지. 수많은 '해야 할 것'들을 잠시 제쳐두고... 내가 지금 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영화 <머니볼>을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실패는 상처로
미국 MLB 아메리칸 리그 소속이자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를 연고로 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Oakland Athletics)의 단장 빌리 빈은 실패한 외야수 출신이다. 프로 선수 누구나 그렇듯, 처음엔 그 동네, 그 학교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본인이었다. 하지만 큰 무대는 다르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애초에 이 자리에 들어왔으면 안 됐다는 절망은 큰 상처로 번져간다. 그렇기에 빌리 빈은 은퇴한 이후에도 늘 '그때 야구를 하지 않고 스탠퍼드 대학교 장학생 자리를 선택했다면?'이라는 후회에 시달린다. 그래서 빌리 빈은 쉽게 순간의 기쁨이나 좋게 될 것 같은 느낌에 휩쓸리지 않는다. 담담하게 "그러면 상처받기 쉽거든."이라고 답할 뿐이다.
삶에 큰 상처를 입힌 실패는 늘 후회로 이어진다. 어느 인도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마음이 현재에 있어야 행복하다. 마음이 과거에 있으면 후회하고, 마음이 미래에 있으면 불안해한다.' 나도 매일 후회를 한다. '그때 그렇게 했다면...' 하지만 그때의 나도 그때의 모습으로 그때의 상황에 맞춰 나름 최선을 다해 얻은 결과였다. 결국 이 꼬리를 무는 후회와 과거에 관한 생각을 끊어내는 것이 앞을 향한 추진력의 원천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건 사람으로
빌리 빈은 확실한 강점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야 할 곳과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Cleveland Indians)의 사무실을 찾아 자신이 원하던 선수를 데려가려 협상을 하던 중 조용히 의견을 전달하던 피터 브랜드에 꽂힌다. 그는 야구를 하던 사람도 아닌 예일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어 빌리 빈은 피터 브랜드가 가진 '머니볼' 이론에 큰 관심을 갖는다. 한정된 예산으로 팀을 살리기 위해서는 피터 브랜드의 방식뿐이라고 생각한 빌리 빈은 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준다. 한 번 결정한 이상 그를 신뢰하며, 거기에 맞춰 자신의 생각도 변화시켜 간다. 나아가 구단의 방식도 변화시켜 간다. 그들의 보기 좋은 팀워크와 우정은 야구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주목할 점은 피터 브랜드의 성장이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자신 없어 보이고 빌리 빈의 등 뒤에 숨어있는 듯 보였다. 정 때문에 선수를 방출시키기 어려워했으며, 빌리 빈 없이는 큰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빌리 빈과 같은 사람을 자신의 선임으로 두며 그의 당당함을 서서히 배워갔다. 빌리 빈은 사람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줄 아는 사람이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물들여갈 줄 아는 사람이다.
성장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이 방법이 아니면 안 되며, 이것으로 반드시 다시 반등할 수 있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자신보다 오래 스카우트 업무를 해오던 원로 스카우터들에게 그는 자신의 방향을 분명하게 전달한다. 자신보다 전략을 짜는데 더 전문적인 감독에게 1루수로 스캇 해티버그를 선발로 기용하라고 끊임없이 고집한다. 망해도 좋다. 이미 이 길에 들어온 순간 끝까지 간다. 빌리 빈의 이러한 정신은 그의 후회 섞인 절망을 밟고 전진하는 듯했다. 동시에 감독 베넷 밀러는 그의 완벽한 추진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빌리 빈은 자주 생각에 잠기고 불안해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길 수 있다면, 어디서든 이길 수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중
그러나 결국 이겨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건 성장과 진보의 밑거름이 된다. 신경과학자 장동선은 2017년 tvN <알쓸신잡 2>에 출연해 이러한 말을 했다.
제가 생물학을 처음에 전공했거든요. 학부 때. 생물학 전공하면서 신기하게 여긴 동물이 갑각류였어요. 게, 새우, 가재...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척추동물이잖아요. 밖은 말랑말랑한데 안에 뼈가 있어요. 갑각류는 뼈가 없어요. 바깥 껍질이 단단해요. 근데 재밌는 게 그렇게 단단하면 어떻게 커요? 성장을 할 때 갑각류가 크려면 어떻게 커요, 꽉 막혀있는데. 허물을 벗어요. 그래서 허물을 벗고 나오는 데, 아무리 힘이 센 왕가재, 게라도 자기 허물을 벗고 나오는 순간은 말랑말랑해서 누구에게 건 잡아먹힐 수 있고 상처받기 가장 쉬운 순간이에요. 그런데 저는 재밌다고 생각한 게,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직 내가 가장 약해지는 때, 상처받을 수 있고 약해지는 그 순간인 것 같아요. 인간의 몸은 척추동물이지만, 인간의 마음은 게나 가재 같지 않을까...
-장동선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그런데 마음을 다잡는 건 매번 반복된다. 오래전부터 그래왔고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상처받을 일도 많고, 좌절할 순간도 수없이 많을 것이며,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도 다시금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겨내자, 이겨내자... 이러한 추상적인 응원도 좋지만, 단지 내가 있는 이 순간을 내가 하는 이 일을 사랑하자. <머니볼>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빌리 빈은 스탠퍼드 대학교에 갈 걸 그랬나 생각이 들며, 자연스럽게 야구를 경멸하고 자신의 삶을 꼬이게 만든 주범이라 비난할 수 있지만, 야구에 결코 등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말 "이래서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는 '자신이 야구를 선택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보다 본인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강하고 속 깊은 의미로 들린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신의 글 쓰기에 관해 질문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최고의 글은 분명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옵니다. 그게 다 똑같아 보인다면, 차라리 아무 설명도 안 하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말: 은둔 시절의 마지막 인터뷰> 중
그리고 돈
빌리 빈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 존 헨리의 천문학적인 연봉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애슬레틱스의 홈구장과 레드삭스의 홈구장을 비교하고, 초라한 사무실의 수잔이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닌 비서가 직접 갖다 주는 커피를 마시는 등 돈과 관련된 어마어마한 규모 차이를 느꼈다. 하지만 돈이 아닌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그대로 다시 쫓는 그가 좋았다.
그는 이미 고등학생 시절 큰 연봉을 보고 프로 야구선수가 되기로 결심을 하며, 다시는 돈만 보고 쫓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여기서 그의 조력자 피터 브랜드는 큰 한 마디를 던진다.
돈은 상징일 뿐이죠.
우리가 어느 정도 잘했는지는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우린 돈이라는 가시적인 표현을 쓴다. 보스턴에서 그에게 그런 제안을 한건, 그가 이전 시즌 오클랜드에서 보여준 능력이 엄청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빌리 빈의 오클랜드는 파이널에서 또 패배했지만, 메이저리그의 판도를 바꿨다. 그리고 확실한 건 그는 이 모든 걸 돈을 위해 하지 않았다.
번외: 스포츠의 힘
<머니볼>은 삶을 노래하는 영화이지만, 스포츠의 힘도 함께 말하고 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무언가를 이뤄내면 내 일상에선 자주 느끼지 못하는 희열과 순간의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 낸 기쁨이 그날의 기분을 통째로 바꿔준다. 암울하던 오클랜드의 경기 진행에 뜬금없는 홈런을 몰고 온 스캇 해티버그의 스윙은 그간 빌리 빈의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날려주었다.
영국 시간 기준으로 어제, 2022-23 프리미어 리그 24라운드에서 아스날 (Arsenal FC)과 아스톤 빌라 (Aston Villa)의 경기가 있었다. 시즌이 중후반으로 가는 만큼, 약 20년 만에 우승을 노리고 있는 아스날이 맨체스터 시티 (Manchester City FC)의 추격을 떨쳐내기 위해선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2:2로 비기고 있던 경기에서, 10분도 채 안 되는 추가 시간은 어제의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들어줬다. 93분 나온 조르지뉴의 중거리슛이 온종일 그 장면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작년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에서 H조의 마지막 조별리그 경기였던 대한민국과 포르투갈의 순간은 지금도 가끔 찾아본다. 마지막 추가 시간 1분에 손흥민의 어시스트와 황희찬의 골이 16강으로 이끌었던 그 찰나는 이렇게 다시 봐도 심장을 뛰게 만든다. 스포츠만의 스토리텔링,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감동은 내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자신이 평생 해온 경기에 대해, 우리는 놀랄 만큼 무지하다
자신이 평생 해온 경기에 대해, 우리는 놀랄 만큼 무지하다.
-미키 맨틀
<머니볼>이 시작할 때 나오는 미키 맨틀의 이 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지금 돌아보면 별거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그 작은 노력의 산물을 우린 너무 많이 무시하고 살아간다. 정말 쉽게 이루어진 건 없었다. 이러한 무지와 망각은 우리에게 또 다른 경계선을 만든다. '이건 넘을 수 없을 거야' 되뇌며 말이다. 피터 브랜드가 데이터 분석실에서 보여준 비디오는 내가 이 영화를 가장 사랑하게 만든 최고의 장면이었던 것 같다.
우리 마이너 팀의 거구 포수 '제레미 브라운'이에요. 얜 아시다시피 2루로 뛰는 걸 겁내죠. 강속구를 받아쳐서 중앙 깊숙이 날렸어요. 이 부분이 흥미로워요. 안 하던 짓을 하거든요. 1루로 내달리는 거예요. 그리고 계속 더 달리죠. 봐요. 여기서 제레미의 악몽이 현실로 나타나요. 이제 그는 깨달아요. 자기가 친 공이 펜스를 넘어갔다는 걸. 홈런을 치고도 그걸 몰랐던 거죠.
나 스스로 정한 한계. 나의 과거가 정한 '여기까지'는 얼마나 우리의 힘을 빼는가.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공을 넘겨왔고, 다시금 홈런을 칠 것이다. 베넷 밀러의 <머니볼>은 이렇게 시작해 이렇게 끝난다.
베넷 밀러의 감독, 아론 소킨의 각본, 브래드 피트의의 PLAN B Entertainment 제작은 이때에도 제대로 된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냈던 것 같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이지만 지금 내 상황에 큰 의미를 주는 작품이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조르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어릴 때에는 나도 미친 충동과 초인적인 욕망이 넘쳐, 세상이 못마땅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을 꼭 붙들고는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
그리고 다시 지금
지금 있는 여기를 사랑하고 지금 배우는 것에 확신을 가져야겠다. <머니볼>의 담담한 위로와 응원을 업고 다시 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걸 함께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 나중에 지금 이 순간을 돌아봤을 때 나도 마라도나처럼 당당히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할 수 있는 걸 했다. 그리 못하진 않은 것 같다.
-디에고 마라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