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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Feb 12. 2024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변치 않았으면 하는 우리의 그들에 관하여.

홀든, 호밀밭에서


우리 모두는 변했다.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1951)>은 주인공 홀든 콜필드 (Holden Caulfield)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그는 학교를 나와 뉴욕 시내를 홀로 방황하면서 매우 솔직하게 본인의 가치관과 감정을 전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그의 상태를 자세하게 파악하게끔 한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가 신기한 건 나도 언젠가 해봤던, 지금도 가끔 하는, 심지어 그런 생각도 해봐야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는 점이다. 이게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점이다.

내가 거기서 뭉그적거린 진짜 이유, 나는 어떤 작별의 기분을 느껴 보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떠나는 줄도 모르고 여러 학교와 장소를 떠나왔다는 거다. 그게 싫다. 슬픈 작별이든 나쁜 작별이든 상관없으니 어떤 곳을 떠날 때 내가 그곳을 떠난다는 건 알고 싶다. 그걸 모르면 기분이 훨씬 더럽다.


좋은 말과 표현으로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날 것의 말로 우리의 옛날 어딘가를 건드리기도 한다. 홀든의 그런 생각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 홀든의 말들은 때때로 내 말 같기도 했다.


홀든은 본인도 설명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가 흔히 말하는 사춘기를 지나는 성장기에 있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누군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을 비뚤어지게만 바라봐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홀든은 사실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본인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상관없다. 그저 본인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가감 없이 설명할 뿐이다. 또한, 누군가의 만남에서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기보다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멋없어 보일지라도.

저의 문제, 저는 누가 딴 길로 새면 그게 좋다는 거예요. 더 재미있고 그렇거든요. ... 제 말은 그 아이가 아주 잘하고 흥분하고 있는데 계속 '벗어났어!' 하고 소리를 지르는 건 더럽다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 제가 생각하는 거, 적어도 어떤 사람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또 뭔가에 흥분하면 그 사람을 좀 내버려 둬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어떤 사람이 뭔가에 흥분할 때가 좋아요. 멋있어요.


홀든은 뉴욕에 있는 사람들 (그에게 있어 사회의 전부라고 느껴지는)에 대해 관심이 많고 불만도 많다. 가식을 극도로 싫어하고, 흔히 말하는 무게 잡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위선을 경멸한다. 사회를 힘, 돈, 명예로만 바라보는 사람들, 혹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행동으로 반항하기도 한다.

물론 그가 연주하는 걸 듣고 싶지만, 가끔은 그의 빌어먹을 피아노를 뒤집어엎고 싶어 진다. 가끔 그가 연주할 때 거물이 아니면 말도 나누지 않으려 하는 종류의 인간 같은 소리가 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은 가졌지만 다른 이가 갖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속상해한다. 그래서 홀든은 자신이 부잣집 아들이라는 것, 변호사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 할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극작가 형의 동생이라는 것에 대해 크게 자랑스러워하지도, 내세우지도, 나아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게끔 이용하지도 않는다. 이 점은 홀든의 내면에서 당장은 큰 충돌은 보이지 않지만 모순적이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는 또래 다른 아이들보다 더 혼란스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내가 수녀들에게서 좋아하는 거다. 우선 그들이 호사스러운 데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 일은 절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니, 그들이 점심이나 그런 걸 먹으러 호사스러운 데 절대 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니 젠장 아주 슬펐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쨌든 슬펐다.
그들 둘이 아침으로 먹고 있는 건 토스트와 커피뿐이었다. 그걸 보니 우울했다. 나는 베이컨과 달걀 그런 걸 먹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토스트와 커피만 먹고 있는 건 싫다.


그래서일까, 홀든의 가장 친한 친구인 그의 동생 피비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빠는 일어나는 모든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이가 그 말을 하자 훨씬 더 우울해졌다. "아니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어. 물론 마음에 들지. 그런 말 하지 마.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오빠는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어떤 학교도 마음에 안 들고. 백만 가지가 마음에 안 들고. 다 안 들잖아."

홀든, 절벽의 끝에서


하지만 홀든은 그저 단순한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반항아가 아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사명이 있다. 자신이 한 학년 한 학년 올라가면서 경험하는 조금 더 어른의 일들, 다시 말해 통상적인 개념에서의 어른이 되어가는 과도기에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니 순수함을 잃고 변해 간다는 것이다. 왜들 그렇게 똑같이 굴까? 그들이 생각하는 그것이 진짜 맞는 것일까? 그게 옳은 것이라고 하면 거기에 저항하는 내가 틀린 것일까? 홀든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대부분 말들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야, 샐리." 내가 말했다. "왜?" 그 애는 맞은편의 어떤 여자애를 보고 있었다. "너 질린 적 있어? 그러니까 네가 뭔가 하지 않으면 모든 게 엉망이 될 것 같아 겁이 난 적이 있느냐고? 그러니까 학교가, 그리고 그 모든 게 마음에 드냐는 거야." "끝내주게 따분하지." "그러니까 그걸 싫어해? 그게 끝내주게 따분하다는 건 아는데 네가 그걸 싫어하냐고, 그게 내가 묻는 거야." "글쎄, 딱히 싫어하지는 않아. 너는 늘 꼭......" "글쎄, 나는 싫어해. 우아, 정말 싫어한다고.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니야. 전부 그래. 나는 뉴욕에 살고 그런 게 싫어. 택시, 또 매디슨 애비뉴 버스들, 운전사나 그런 사람들이 늘 뒷문으로 내리라고 고함을 지르고, 런트 부부를 천사라고 부르는 가식적인 녀석들 소개를 받고, 그냥 밖에 좀 나가고 싶을 뿐인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고, 늘 브룩스에 가서 바지를 맞춰 입고, 사람들이 늘......" "소리 지르지 마, 제발." 우리의 샐리가 말했다. 아주 웃기는 일이었다. 나는 소리 지른 일도 없는데. "차를 봐." 나는 그 말을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을 봐. 사람들은 차에 환장해. 차가 조금이라도 긁힐까 걱정하고 늘 1갤런으로 몇 마일이나 갔는지 이야기하고, 새 차를 뽑는 순간 이미 더 새로운 차로 바꿀 생각을 하고 있어. 나는 오래된 차도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관심조차 없단 거야. 젠장 차라리 말을 갖겠어. 말은 적어도 인간적이잖아. 참 나. 말은 그래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우리의 샐리가 말했다. "이 말을 하다 갑자기......"... "언제 한번 남학교에 가 봐야 해. 언젠가 가 봐. 가식적인 인간으로 가득해. 하는 거라곤 언젠가 빌어먹을 캐딜락을 살 수 있을 만큼 영리해질 수 있도록 공부하는 것뿐이고, 풋볼 팀이 지나 안 지나 젠장 관심이 가는 척하는 시늉을 늘 해야 하고, 하는 짓이라고는 온종일 여자와 술과 섹스 이야기나 하는 거고, 또 모두 그 더럽고 조그만 빌어먹을 패거리로 똘똘 뭉쳐 있어. 농구부 애들끼리 똘똘 뭉쳐 있고, 가톨릭끼리 똘똘 뭉쳐 있고 빌어먹을 지적인 애들끼리도 똘똘 뭉쳐 있고 브리지 하는 녀석들끼리 똘똘 뭉쳐 있어. 심지어 빌어먹을 '이 달의 책 클럽'에 속한 녀석들마저도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있어. 좀 노력을 해서 조금이라도 말이 되는......" "야, 잘 들어." 우리의 샐리가 말했다. "많은 남자애가 학교에서 그것보단 많은 걸 얻어." "동의해! 그런다는 데 동의해. 걔들 가운데 일부는! 하지만 내가 거기서 얻는 건 그게 다야. 알아? 그게 내가 말하고 싶은 거야. 그게 바로 젠장 내 말의 핵심이라고. 나는 어떤 걸로부터도 어떤 것도 얻지를 못해. 나는 엉망이야. 개판이라고."


홀든은 그가 다니던 학교 펜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가방을 챙겨 기숙사를 나온다. 친구와 싸우고, 공부도 하고 싶지 않으며, 학교에 있는 애들 중 몇몇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이유다. 물론 성적 때문에 어차피 학교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불만만큼 마음이 강한 사람은 아니다. 미안한 마음에 쉽게 약해지며 잡생각에 금방 여려진다. 싫지만 그들이 내게 해준 것들, 나를 도와준 것들, 그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음을 자주 떠올리며 지금 자신의 행동이 너무했나 돌아보곤 한다. 사실 홀든은 자신이 욕하던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던 것이다.

너무 외로웠다, 갑자기. 죽어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짐 쌀 때 한 가지 약간 우울한 게 있었다. 어머니가 사실상 방금, 그러니까 이틀 전에 보내준 그 신품 스케이트를 싸야 했다. 그게 우울했다. 어머니가 스폴딩에 가서 판매원에게 백만 가지 멍청한 질문을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 그런데 여기서 나는 다시 잘리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몹시 슬펐다. 어머니는 나에게 엉뚱한 스케이트를 사 주었지만 - 나는 경주용 스케이트를 원했는데 어머니는 하키용을 샀다 - 그래도 슬펐다. 누가 나에게 선물을 줄 때마다 언제나 결국은 슬퍼지게 된다.
내가 진짜로 걱정한 것은 내가 잠을 깼을 때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그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거였다. 그러니까 그가 나에게 호모처럼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 게 혹시 잘못인지 궁금했다는 거다. ... 그러니까 그가 호모라 해도 나한테 아주 잘해 준 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거다. 내가 그렇게 늦게 전화를 했는데도 그가 상관하지 않은 것, 오고 싶으면 바로 오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애써서 정신의 크기를 찾아내고 그러라고 조언을 해준 것, 또 아까 말했던 제임스 캐슬이 죽었을 때 가까이라도 갔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 나는 그 모든 걸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할수록 더 우울해졌다.


나는 가끔 정이 너무 많아 발목을 잡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냥 남들에게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이 난 항상 아쉽다. 그래서 물건도 잘 버리지 못한다. 그때 그 사람이 나한테 줬던 것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나에게 써준 마음이기도 하고, 그게 있어야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살아갈 것 같기도 해서인 것 같다. 그래서 홀든의 말들이 무슨 느낌인지 너무 잘 알 것 같다. 마음의 소중함을 아는 홀든은 아직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들어 봐, 너한테 주려고 레코드를 한 장 샀어. 그랬는데 집에 오는 길에 깨 먹고 말았어." 나는 코트 호주머니에서 조각들을 꺼내 그 애한테 보여 주었다. "술에 떡이 됐거든." "그 조각들 줘. 내가 보관할게." 아이는 그걸 내 손에서 받아 들더니 침대 옆 탁자의 서랍에 넣었다. 이 아이가 나는 너무나 좋다.

홀든, 호밀밭의 파수꾼 I


홀든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말한다. 그는 아이들이 걱정 없이 뛰노는 호밀밭을 절벽 밑의 위험, 타락, 순수를 해치는 욕망, 옳지 않은 사회적 합의 혹은 질서로부터 지키고 보호하고 싶다고 한다.

어쨌든 나는 그 모든 어린 꼬마들이 호밀밭이나 그런 커다란 밭에서 어떤 놀이를 하는 모습을 계속 그려 봐. 어린 꼬마 수천 명, 주위에 아무도 없고 - 그러니까 어른은 없고 - 나를 빼면. 그런데 나는 어떤 미친 절벽 가장자리에 서있어. 만일 꼬마들이 절벽을 넘어가려 하면 내가 모두 붙잡아야 해 - 그러니까 꼬마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지도 않고 마구 달리면 내가 어딘가에서 내가 꼬마를 붙잡는 거야. 그게 내가 온종일 하는 일이야. 나는 그냥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그런 노릇을 하는 거지. 나도 그게 미쳤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게 내가 진짜로 되고 싶은 유일한 거야. 나도 그게 미쳤다는 거 알아.


놀이공원의 회전목마만 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던 사람들, 시답지 않은 농담이 세상에서 제일 웃기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떤 면에서는 또 좀 우울하기도 했다. 계속 그들 모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애들이 학교와 대학을 나오면, 그 아이들 대부분은 아마 멍청한 녀석들 하고 결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빌어먹을 차에 1갤런을 넣으면 몇 마일을 가는지나 늘 이야기하는 녀석들. 골프에서 이기거나, 심지어 탁구 같은 멍청한 게임에서 이기기만 해도 열을 내고 유치해지는 녀석들. 아주 비열한 녀석들. 절대 책을 읽지 않는 녀석들. 아주 따분한 녀석들.
갑자기 젠장 아주 행복한 기분이었다. 우리의 피비가 계속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 나는 빌어먹을 고함을 지를 뻔했다, 나는 그럴 만큼 젠장 행복한 기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아이가 아주 젠장 멋져 보였다, 아이가 파란 코트나 그런 걸 입고 계속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이. 맙소사, 거기서 그걸 봤어야 하는데.

홀든, 호밀밭의 파수꾼 II


2019년 프랑스 교환학생 생활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고, 우리는 더 어른이 되기 전에 호주로 가 없던 것을 만들어 보자고. 그런데 그 얘기는 결론적으로 서로를 좀 갈라놓는 계기가 됐다. 그땐 이해가 안 갔지만 이제 알겠다. 20대 중반, 끝나가는 스무 살의 무모함 혹은 야망, 군대에서 2년 만에 사회로 돌아왔을 때 보이던 늦었다는 초조함. 우리는 절벽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아니야. 절대 그런 게 아니야." 우리의 샐리는 말했다. 나는 그 애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한텐 그런 일을 할 많은 시간이 있을 거야 - 그 모든 일을 할. 내 말은 대학에 가고 그런 뒤에, 그리고 우리가 혹시라도 결혼하고 그러면, 갈 수 있는 굉장한 곳이 많을 거야. 너는 그냥......"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갈 수 있는 굉장한 곳이 절대 많지 않을 거야. 그건 완전히 다를 거야." 나는 다시 겁나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 "아니라고 했어, 내가 대학 가고 그런 뒤에 갈 수 있는 굉장한 곳이 있지 않을 거라고. 귀를 열고 잘 들어. 그건 완전히 다를 거야. 우리는 여행 가방이나 그런 걸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할 거야. 모두에게 전화해서 작별 인사를 하고 호텔이나 그런 데서 그림엽서를 보내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어떤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거고, 택시나 매디슨 애비뉴 버스를 타고 출근하고, 신문을 읽고, 늘 브리지를 하고, 영화관에 가서 멍청한 단편 영화와 예고편과 뉴스 영화를 많이 볼 거야. 맙소사. 뉴스에서는 늘 멍청한 경마가 나올 거고, 어떤 부인이 뱃전에서 샴페인 병을 터뜨릴 거고, 어떤 침팬지는 바지를 입은 채 빌어먹을 자전거를 탈 거야. 전혀 똑같지 않을 거야.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몰라." ... 애초에 시작한 게 겁나게 후회되었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는, 영원한 파수꾼이고 싶은 홀든은 아직 절벽 밑으로 떨어지지 않은 자들이 영원히 호밀밭에서 뛰어놀았으면 한다. 자신은 절벽 밑을 살짝 보았기 때문에 내려가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과 함께. 장난만 치는 소년들은 계속 소년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흑심을 품고 접근하는 남자에게서 오랜 친구 제인이 도망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내 가장 소중한 동생 피비가 영원히 꼬마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것은 모든 게 늘 바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십만 번을 가도 그 에스키모는 여전히 그 물고기 두 마리를 막 잡은 뒤고, 새들은 여전히 남쪽으로 가고 있을 거고, 사슴은 여전히 예쁜 뿔과 예쁘고 가느다란 다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그 물웅덩이의 물을 마시고 있을 거고, 가슴이 드러난 그 인디언 여자는 여전히 똑같은 담요를 짜고 있을 거다. 아무도 달라지지 않을 거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건 우리다. 그렇다고 우리가 훨씬 나이가 들거나 그렇지는 않는다. 딱히 그런 건 아닐 거다. 그냥 갈라질 거다. 그뿐이다. 이번에는 외투를 입고 있을 거다. 아니면 줄에서 짝이었던 아이가 성홍열에 걸려 새 짝이 생길 거다. 아니면 미스 에이글틴저 대신 반을 맡는 선생님과 있을 거다. 아니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욕실에서 무시무시한 싸움을 벌이는 소리를 들을 거다. 아니면 그냥 거리에서 휘발유 무지개가 걸린 웅덩이를 지날 거다. 내 말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다를 거란 뜻이다 - 내가 하려는 말을 설명할 수가 없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그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걷고 또 걸으며 우리의 피비가 내가 그러던 것처럼 토요일에 박물관에 가는 것을 계속 생각했다. 내가 보던 것을 그 애는 어떻게 볼까,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애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한다고 딱히 우울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겁나게 즐거워지지도 않았다. 어떤 것들은 있는 그대로 늘 있어야 한다. 그 커다란 유리 상자에 갖다 두고 그냥 내버려 둘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안 좋다. 어쨌든 걸으면서 나는 계속 그 모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갖고 있어. 나 대신 갖고 있어." 아이는 바로 뒤에 덧붙였다 - "제발." 그건 우울했다. 누군가 "제발"하고 말하는 거. 그러니까 그게 피비나 누구라면.


그래서 점점 홀로 남는 것 같은 홀든은 외롭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애초에 그 애한테 왜 그런 걸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어딘가, 매사추세츠나 버몬트나 그런 데로 떠나자고. 아마 그 애가 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 해도 데려가지 않았을 텐데. 다른 모든 사람은 몰라도 그 애하고는 가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끔찍한 부분은 내가 그 애한테 가자고 했을 때는 진심이었다는 거다. 그게 끔찍한 부분이다. 하느님께 맹세하는데 나는 미치광이다.

홀든, 호밀밭의 파수꾼 III


우리 모두 지나온 가장 순수하던 꼬마 시절. 홀든은 이걸 지켜주는 게 지금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어른을 보자, 어른은 자면서 입을 활짝 벌리고 있으면 형편없어 보인다. 하지만 꼬마들은 다르다. 꼬마들은 괜찮아 보인다. 심지어 베개를 침 범벅으로 만들어도 여전히 괜찮아 보인다.
맙소사, 스케이트 끈을 묶어 주고 그럴 때 꼬마가 착하고 예의 바르면 정말 좋다. 꼬마들은 대부분 그렇다. 정말 그렇다. 그 아이한테 핫초콜릿이나 그런 걸 함께 먹겠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고맙지만 됐다고 말했다. 친구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꼬마들은 늘 자기 친구를 만나야 한다. 끝내준다.
누가 벽에 'FUCK YOU'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그것 때문에 젠장 거의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 피비나 다른 어린 꼬마들이 그걸 보고,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고, 그러다 마침내 어떤 지저분한 꼬마가 그게 무슨 뜻인지 말해 주고 - 당연히 아주 거만하게 - 꼬마들은 모두 이틀 동안 그 생각을 하고, 어쩌면 심지어 걱정까지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썼는지 몰라도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러다 아이가 빌어먹을 말에서 떨어질까 봐 좀 걱정되었지만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꼬마들에게 중요한 거, 꼬마들이 황금 고리를 잡고 싶어 하면 그렇게 하게 놔두고 아무 말 하지 말아야 한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다. 꼬마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건 나쁘다.

홀든, 호밀밭의 파수꾼 IV


사실 홀든을 포함해 우린 변해야 할 거고 (영원히 홀든같이 살 수 없을 거고), 그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홀든이 내내 경멸하던 '호밀밭의 절벽에서 떨어진 자들'로 합류하게 될 것이다.

"전에는 싸움을 많이 했죠. 난 모든 것에, 어떤 것에든 강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이제 난 조용히 있는 법을,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두는 법을 배웠어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죠... 거짓말하는 게 아니다 싶으면. 그러고는 확실히 알려고 말을 좀 하고요. 이야기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한테는 소용없어요. 잘 아는 주제라면 왜 이야기를 합니까? 모르는 주제라면 왜 바보짓을 합니까?"

-어니스트 헤밍웨이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조르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어릴 때에는 나도 미친 충동과 초인적인 욕망이 넘쳐, 세상이 못마땅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을 꼭 붙들고는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


소설의 첫 부분부터 홀든은 이별에 관해 생각한다. 누군가와 헤어질 때 혹은, 어딘가를 나설 때,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가슴이 먹먹해진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모르고 떠나왔던 것 같다. 이처럼 문득 사사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홀든은 말한다. 말은 그렇지 않아도 사실 서운하다고. 그리고 우리 그때 같이 놀던 호밀밭이 그립다고. 변했어도 그때는 그대로 기억한다고.

"나는 알리가 마음에 들어.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걸 하는 게 마음에 들어. 여기 너하고 앉아서 이야기하고 이런 생각을 하고 또......" "알리는 죽었어 - 오빠는 늘 그러더라! 누가 죽고 그래서 천국에 있으면 그건 사실......" "나도 죽은 거 알아!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 그래도 나는 그 애를 좋아할 수 있어, 안 그래? 누가 죽었다고 해서 좋아하는 걸 그냥 멈추게 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참 나 - 특히 지금 살아 있고 그렇다는 걸 우리가 아는 사람들보다 그 사람이 천 배쯤 착할 때는."
웃기는 거, 옮긴 뒤에 녀석이 좀 보고 싶었다는 거다. 녀석의 유머 감각은 겁나게 멋졌고 우리는 가끔 아주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녀석도 나를 보고 싶어 한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거다.
나는 그 아이들을 가끔 미워했지만 - 그건 인정해요 - 그게 그렇게 오래가진 않았어요, 그게 제 말이에요. 좀 지나서 그 애들이 안 보이면, 그 애들이 방에 들어오지 않으면, 또는 식당에서 두어 끼 동안 보이지 않으면, 좀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을 좀 보고 싶어 한다고요.

홀든, 호밀밭의 파수꾼 V


그래서 그는 그의 긴 이야기를 이렇게 끝낸다.

유일하게 아는 거. 나는 그저 행복했다. 정말 행복했다.
내가 아는 유일한 거, 나는 이 이야기에서 들먹인 모든 사람이 좀 보고 싶다. 예를 들어 심지어 우리의 스트래들레이터와 애클리까지도. 그 빌어먹을 모리스도 보고 싶은 것 같다. 웃긴다. 아무한테도 아무 이야기도 절대 하지 마라. 하게 되면 모두 보고 싶어 진다.

절벽 아래를 마주하는 것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이 투 마마 (2001)>는 지금은 그 사건들이 내 남은 삶에 영원히 영향을 미칠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건 찰나일 뿐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홀든도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의 마음은 우리에게 충분히 전했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 그는 누구보다도 깊고 넓은 사람이다.

미아가 되었을 때 그 아이를 덮치는 불안은 아마도 부모를 잃었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닐 것이다. 그건 나 따위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 ‘세계’, 그리고 그 무관심과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된다는 커다란 당혹감이다. 그 소외감의 체험이 소년을 공포의 밑바닥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리라.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고 감싸주는 존재의 곁을 떠나 ‘타자’로서의 세계와 마주하는 사람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누구나 경험해야 할 이런 뜻밖의 만남을 예행연습으로서 폭력적으로 강제 체험하는 것이 미아라는 경험 아닐까. 바로 그래서 미아는 갓난아이처럼 울부짖는 것이다. 홀로 세계에 내팽개쳐졌다는 공포로 인해 세차게 우는 것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울어봤자 이제는 고독하게 세계와 마주해나가야 한다고 깨달았을 때, 소년은 자신이 미아라는 점과 결별하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닐까. 그때를 경계로 어머니는 자신을 감싸 안아주는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 한구석에서 자신을 기다려줄 뿐인 조그만 존재로 변한다. 한때 미아였던 어른은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번에는 남몰래 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중

철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도 호밀밭에 있었고, 떨어지지 않았었다. 그땐. 그리고 떨어지기 싫어서 다른 이들에게 같이 떨어지지 말자고도 했었고. 홀든처럼 떨어진 자들은 비웃고 욕했고, 나 역시 부가적인 것들 그들의 주변 것들까지 다 싫었었다. 나는 다르게 살기 위해서. 그런데 시간이 조금씩 흐르며, 어느 순간 돌아봤을 때, 지금의 나를 바라봤을 때, 나도 떨어진 것 같다, 결국.


내 가장 친한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예전보다 평범해진, 검은색이 대부분인 옷차림, 예전보다 까불지 않는 것, 그것들이 좋지는 않다고. 때로는 그때의 내 모습이 좋기도 하다고 했다. 떨어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호밀밭에 있는 나도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나도 그 친구도 마음 한편에는, 사실 홀든은 변호사의 아들이라 그러는 거라고, '중2병'이 와서 그런 거라고, 읽을수록 홀든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고 단순한 투정을 부리고 짜증을 내는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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