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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 백 Jan 28. 2019

세련된 세상에 던지는 촌스러운 질문

증인 Innocent Witness, 2019





【감상 후기(브런치 무비 패스) - 증인 Innocent Witness, 2019】

드라마 | 한국 | 2019.02.13 | 129분, 12세이상관람가 | (감독) 이한 (주연) 정우성, 김향기  ⓒ Daum 영화




♥. 변호사는 사람이 아닌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도 사람이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시대의 당위는 압도적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때가 묻어야 한다. 때가 묻는다는 것은 시대의 가치 아래 인간성을 묻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련된 이 시대의 가치에 따르자면 변호사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에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비정상’적이고 참으로 한심한 일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당위는 비단 변호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압도하고 있다.


사실 변호사도 사람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앞선 글처럼 인간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기에 끝까지 정도를 걷기 힘든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후자의 의미가 이 시대 당위에 어울리는 것일 테고, 그래서 소위 ‘공감’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현실에 순응하려 노력하고 있는 ‘순호(정우성)’ 역시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상엔 인정해야 할 것도 있다고.”

ⓒ Daum 영화



♥. 변호사도 사람이기에...


대형 로펌의 변호사로 살아가고 있는 순호는 과거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어쩌면 거대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해왔을지도 모르는 그에게, 그 어느 단체보다도 현실이라는 말에 잘 어울리는 대형 로펌에서의 활동이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가 현실이라는 당위에 순응하려고 하는 것은, 사회적 당위로서의 현실에 무릎 꿇은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현실을 무겁게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표현하지는 않지만)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 착한’ 아버지(박근형)가 있다. 그런 그의 아버지는 시대의 뒤편에서 파킨슨병을 앓고 있고, 사람을 사랑하기에 얻게 된 가난 속에서 무기력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가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다. 그래서 순호는 자신이 추구하는 대로 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삶이 좋은 삶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또 설득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순호가 안타깝고 미안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철없는 아이처럼 장난을 치며 해맑은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사죄이자 사랑이었을 것이다. 순호의 아버지는 그렇게 순호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해내고 있는 것이다.


ⓒ Daum 영화


삶의 태도의 변화는,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선택하는 행위는 언제나 강력한 편견을 발생시킨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렇게 살지 않는 것에는 자신도 모르게 부동의 하게 되기 때문이다. 삶은 이분법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람은 그러한 이분법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었을 법한 순호조차도 자신에게 생긴 편견을 쉽게 인식하지 못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자신이 마주한 사람을 ‘오래 보고, 자세히 보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애정’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렇게 다른 사람을 오래 보고 자세히 보는 사람일수록 자신 안의 편견을 발견할 확률이 높다. 순호는 그런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옛 동료가 그에게 ‘변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그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순호는 한 살인 사건을 맡게 됐다. 그런 상태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영화는 그 사건이 순호의 출세와 직접적으로 연계시킨다. 순호가 그 사건을 승소하게 되면, 그는 대형 로펌의 간판 변호사(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삶의 현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강력하고 확실한 기회이다. 그 기회 앞에서 순호는 한 명의 증인을 만나게 된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의 건너편에 살고 있는 고등학생 ‘지우(김향기)’가 그 증인이다. 그리고 지우는 ‘자폐’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두 사람이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 Daum 영화




♥.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이 영화가 담은 주제는 어쩌면 그다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변호사도 사람이다’라는 말이 공감을 넘어 인기를 얻으려면,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다’라는 내용을 담았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잘 못이 없어야 하는 것’이 시대의 분위기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담겨있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사람’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현시대의 의식과는 철저하게 상충한다. 게다가 ‘할 수 있다’는 말은 이 시대엔 폭력으로 정죄된 가치이다. 그렇게 이 영화의 주제는 시대착오적으로 착하다. 이 시대에 착한 영화는 ‘구태’의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시대의 당위, 즉 현실이라는 시선으로 본다면 이 영화와 영화 속 주요 인물의 변화는 성장이 아니라 퇴보이다. 게다가 영화의 문법도 예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돋보일 수도 있다. 이 시대에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건, 용기勇氣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2019년, 신의 죽음을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타인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는 이 시대, 나를 넘어서 DNA의 생존만이 당위인 이 시대에, 아직도 ‘진심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대중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돈 많이 벌면 좋은 거냐?”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물론 이 영화의 주제는 위와 같이 단선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가치의 충돌을 날카롭게 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상당히 부드러운 톤으로 조금의 강요도 없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한다. 마치 순호의 아버지처럼 말이다. 순호의 아버지가 그저 미소로 묵묵히 순호 곁에 머무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지우의 목소리를 통해서 영화는 말한다.

ⓒ Daum 영화


“증인이 되고 싶어.”


“나는 변호사는 되지 못하겠지. 하지만, 증인을 될 수 있지 않을까. 증인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진실이 무언지 말해주고 싶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히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 정도로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서로가 느끼기에 더 좋은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우의 말처럼 거창한 일이 아닐 것이다. 환한 불빛을 비춰서 누군가를 지켜 주지는 못한다고 해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한 명, 한 명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순호의 목소리를 통해서 또 이야기한다.


“나만 생각했습니다.”


“지우는 진실만을 이야기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우와 소통하는 방법을 몰랐던 겁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무엇이 진실인지 구별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순호는 말한다. 나만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이해하려 할 때, 그래서 소통하려는 방법을 찾아 나설 때, 그리고 마침내 소통할 때 우리는 거짓 속에서 진실을 찾아낼 수가 있다고 말이다. 



♥.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 Daum 영화


어떠한 당위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는, 타인을 향한 진심이 있을 때 사소함 속에 가려진 작은 진실까지도 우리는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진실은 서로가 서로를 파헤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멀찌감치 떨어진 건너편에 서서 큰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 보다, 옆에서 함께 걸으며 이야기 할 때, 서로의 작은 목소리까지도 진심으로 알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물론 처음엔 어색하고 때로 거부감이 들기도 하겠지만, 그마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과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우리는 안다. ‘상대방이 다가 올 수 없다면, 내가 다가가면 된다.’  당신의 따뜻한 눈과 목소리 그리고 손을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그것이 당장은 사회적 시선에 의해 ‘비정상’이나 ‘퇴보’라고 불린다고 해도 말이다.


ⓒ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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