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던 날, 세상의 모든 빛이 나를 향해 쏟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빛은 이내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바뀌었다. 나 또한 ‘엄마’라는 배역이 처음이었기에, 무엇이 정답인지 몰라 늘 전전긍긍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곧 나의 성적표 같았고, 아이의 성장은 나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지표처럼 느껴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그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기대’라는 옷을 껴입기 시작했다.
첫째 아이는 나에게 있어 늘 예행연습의 대상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툴렀고, 그 서툼을 가리기 위해
나는 더 높은 기준을 세웠다. 남들보다 빠른 뒤집기, 남들보다 앞서가는 학습,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 부러워
할 만한 완벽한 아이. 나는 아이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싶다는 부모의 당연한 욕심을 부렸지만, 사실 그 안엔 실패하고 싶지 않은 나의 조급함이 숨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첫째 아이의 작은 등은 내가 지워준 기대의 무게로 늘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아이가
무언가 실수를 할 때면 나는 마치 내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좌절했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라는 말은
내 불안을 감추기 위한 가장 비겁한 변명이었다. 아이가 가진 고유한 색깔을 들여다보기보다, 세상이 정해놓은 틀에 아이를 끼워 맞추려 애썼다.
엄마라는 이름의 권력으로 아이의 하루를 설계하고, 아이의 미래를 미리 그려보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와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는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고, 나는 아이의 성취 여부에 따라 기분이 롤러코스터처럼 널뛰었다. 첫째에게 나는 엄마이기보다,
매 순간 아이의 점수를 매기는 엄격한 기록관에 가까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둘째를 키우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첫째 때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조급함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를. 둘째를 대하는 나의 마음에는 이전에 없던 ‘여유’라는 빈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은 첫째라는
험난한 예행연습을 거치며 깎이고 다듬어진 훈장 같은 것이었다.
둘째 아이를 바라볼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남들은 어디까지 했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대신 “우리 아이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지?”를 묻는다. 아이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기’보다,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데 더 집중하게 되었다.
기대를 내려놓으니 비로소 아이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기적으로 다가왔다. 형보다 조금 늦게 걷는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글자를 조금 늦게 뗀다고 해서 아이의 인생이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오히려 아이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양말을 신었을 때의 그 뿌듯한 표정, 엉뚱한 상상을 늘어놓으며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 진짜 성장이 들어있음을 발견한다.
이제 나는 아이의 앞장에 서서 길을 닦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의 한 발짝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그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 그것은 방임이 아니라 가장 깊은 신뢰의 표현이다.
“이건 이렇게 해야지”라고 지시하던 입술을 깨물고, 아이가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다려주는 일.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수행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첫째 때의 내가 ‘완벽한 결과’를 꿈꾸는 조각가였다면, 지금의 나는 ‘아이의 계절’을 기다리는 농부에 가깝다. 비가 오면 비를 맞히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게 두며, 아이가 스스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을 다져주는 것. 그것이 내가 둘째를 통해 배운 가장 큰 지혜다.
첫째에게는 늘 미안함이 남는다. 나의 첫 번째 서툼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라준 아이. 하지만 그 아이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둘째를 이토록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결국 아이를
키운다는 건, 부모가 아이를 가르치는 과정이 아니라 아이들이 부모를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이었다.
오늘도 나는 거실 한복판에서 장난감을 늘어놓고 노는 두 아이를 바라본다. 첫째에게 쏟았던 과도한 기대의 그림자를 거두고, 둘째에게 건네는 여유로운 미소를 챙긴다. 아이는 존재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마로서 나의 지혜는 이제 ‘더하기’가 아닌 ‘빼기’에 있다. 내 욕심을 빼고, 남들의 시선을 빼고, 불필요한 걱정을 빼는 일. 그렇게 남겨진 순수한 사랑의 자리에 아이가 마음껏 자신의 세계를 그려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
첫째가 예행연습이었다면, 둘째는 실전이 아니라 ‘치유’다. 나의 부족함을 용서하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축복이다. 나는 오늘도 두 아이 사이에서 어제의 나를 반성하고 내일의 나를 기대한다. 우리는 오늘도 나란히, 각자의 속도로 자라고 있다.
엄마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나를 발견하는 시간.
메이옌의 연재 시리즈 <다시 쓰는 이름>은 매주 목요일 밤 9시,
당신의 육퇴 시간을 함께 합니다.
목요일 밤, 우리 함께 엄마라는 이름을 다시 써 내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