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산책, 따뜻한 라면 한 끼와 야생 사슴이 준 선물 같은 하루
오늘은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 밴쿠버 근교에 위치한 골든 이어스 주립공원(Golden Ears Provincial Park)에 다녀왔다. 밴쿠버에서 가까운 이곳은, 이름처럼 황금빛을 띠는 쌍둥이 봉우리 ‘골든 이어스(Golden Ears)’에서 유래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치 황금 귀처럼 솟아오른 두 봉우리는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는 이 지역의 상징이다.
최근 몇 달 전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어느새 3년이 흘렀다. 시간은 언제나 실감 나지 않다가도, 익숙한 장소 앞에 다시 서면 그 간극을 실감하게 된다. 공원 안에는 캠핑장과 해변, 폭포가 함께 자리해 있고, 우리는 그중 해변가로 향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강가에 도착하자, 공원에 설치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라면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컵에 내린 맥심 커피도 오늘도 빠지지 않았다. 누구는 “왜 또 라면이야?” 하고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야외에서 먹는 국물 음식은 늘 정답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라면 한 그릇은 바람이 차가울수록 더 든든하고 맛있다.
해변의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자, 우리는 폭포를 향해 산책길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주차장을 나와 산 정상 쪽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으로는 캠핑장 가는 길이, 좌측으로는 비포장 도로가 이어진다. 그 비포장 도로를 따라 5분 정도 이동하면 Lower Falls Trail 입구가 나온다. 입구를 지나 숲 속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계곡물소리와 함께 산의 품이 점점 깊어진다.
계곡 너머 산자락엔 아직도 눈이 소복이 쌓여 겨울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밴쿠버 주변의 산들은 대부분 만년설로 덮여 있었지만, 지구 온난화 탓인지 이제는 특정 산에서만 겨우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계곡의 물빛은 에메랄드색이다. 산에서 내려온 빙하수가 흐르기 때문인데,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며 염분 농도를 낮춰 밴쿠버 어장의 생태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의 바다와는 또 다른 색과 맛이 있다.
산길을 걷다 보면 고사된 나무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그 위용만 봐도 얼마나 오랜 시간 이 땅을 지켜왔는지 알 수 있다. 나무를 사진에 담고 있을 때 집사람은 그런 나무 옆에 서보라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무 옆에 사람이 함께 있으니, 나무의 존재감이 사진 속에서 더 뚜렷해졌다. 자연 속에서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였고, 그 작음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폭포에 도착하자 수량이 꽤 많았다. 최근 내린 비 때문인지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졌다. 가까이 다가가면 옷이 금세 젖어버려 조심해야 했지만, 그만큼 생동감 있고 웅장한 모습이었다. 조금 아래 계곡 쪽으로 자리를 옮겨 동영상과 사진으로 폭포를 담았다. 바위 위에 올라서 사진을 찍으려다 잠깐 미끄러질까 긴장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풍경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돌아오는 길, 갑자기 세 마리의 사슴이 나타났다. 놀라움과 설렘이 동시에 밀려왔다. 사슴이 도망칠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 채 사진을 남겼다. 곧 사슴들은 산속으로 사라졌지만, 동물원이 아닌 진짜 자연 속에서 만난 그 순간은 마치 선물 같았다.
밴쿠버 근교 산길을 걷다 보면 곰과 마주치는 일도 종종 있다고 들었지만, 오늘처럼 예기치 않게 곰이 아닌 사슴을 마주한 내 마음 깊은 곳에 잔잔한 기쁨을 남겼다. 괜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 오래된 감정 하나가 조심스레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느 날 문득,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상상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상상은 곧 꿈이 되었고, 그 꿈은 우리를 어디든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상상은 점점 멀어지고 우리는 현실적인 꿈만을 좇게 된다. 오늘 이 산책에서 만난 자유롭고 환한 순간들이, 그 오래된 상상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었다.
시내로 돌아오는 길, 산과는 달리 공기는 한결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래서 산을 찾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잠시 멀어져 자유롭게 숨 쉬고, 사색할 수 있는 시간. 오늘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연이 건네준 특별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