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스턴에서 맞이한 봄의 여유와 새로운 발견
4월의 마지막 날.
한국보다 하루 느린 하루를 맞이한다. 올해는 온전히 4월을 마음껏 가슴에 담았던 시간이었다. 새순이 돋고, 꽃망울이 맺히고, 어느 날 문득 활짝 피어버린 꽃들의 향연은 그저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가슴속에 번져갔다. 마치 아기가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듯, 그렇게 나는 4월의 기나긴 여행을 마무리했다.
차로 35분, 거리로는 32km 남짓. 밴쿠버 인근 리치먼드(Richmond)의 조용한 항구 마을 스티브스턴(Steveston)에 도착했다. 봄 햇살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지던 날, 몇 해 전 추운 겨울에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매서운 바닷바람에 몸을 움츠려야 했다. 짧은 산책으로 끝이 났던 그날은 이곳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마저 접게 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스티브스턴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부부를 맞이했다. 날씨가 포근했던 탓일까. 그때 보지 못했던 거리와 골목, 박물관과 공원, 하늘을 나는 독수리까지. 미처 몰랐던 풍경이 마음을 두드렸다.
그동안 밴쿠버의 겨울은 길고도 지루했다. 해가 나는 날보다 비 오는 날이 더 많았고,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흐린 하늘을 보았다. 문화적 공유가 적은 이민자의 삶의 겨울은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인내의 시간 속에서도 4월은 어김없이 왔다. 꽃이 피고, 바람이 달라지고, 공원이 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처럼 ‘삶이 이렇게까지 새로울 수 있구나’ 싶은 마음은, 어쩌면 4월 만의 선물이다.
T. S. 엘리엇(T. S. Eliot)은 그의 대표 시 「황무지(The Waste Land)」의 첫 구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틔우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메마른 뿌리에 봄비를 끼얹는다고 했다. 희망이 피어나는 계절인 동시에, 인간 내면의 고통을 자각하게 만드는 모순된 시간이기에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잔인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꽃잎 하나, 하늘 한 줄기, 바람 한 조각이 위로처럼 스며드는 순간들 속에서, 4월은 내게 잔인함보다 자연의 고백, 시간의 속삭임, 인생의 찬란함에 다가서는 시간을 가졌다.
4월은 그렇게 나를 가만히 다독였고, 나는 그 위로를 따라 스티브스턴 바닷길을 묵묵히 아내와 걸었다. 오래된 박물관의 벽을 지나고, 고요한 공원에 이르러, 수호신처럼 떠 있는 독수리를 바라봤다. 아내는 독수리가 날아 앉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고 기뻐했다. 오늘도 새로운 공원의 길을 걷는다. 낯선 감정이 가슴 안에서 4월의 마지막 꽃을 피운다.
이제 4월과 이별할 시간이다. 그러나 나는 이 아름다운 4월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진하게 마음에 품고 떠나보내고 싶다. 그리고 바랐다. 5월에는 4월처럼 따뜻하고 평화로운 순간들이 다시금 내 곁에 머물러 주기를. 나는 지금, 봄의 기운을 날개에 달았다.
이제 높고 멀리, 오월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갈 시간이다. 꽃이 진 자리에 잎이 무성해진 듯, 계절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햇살은 눈부시게 맑았다. 구름마저 합세한 하늘은 빛났다. 어쩌면 5월은, 위로가 아니라 다가올 나의 다짐 같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바람이 있다. 그 바람이 이 계절을 함께 걷는 이들에게도 따뜻한 바람과 찬란한 햇살이 가득하길 바랐다. 그렇게 나는, 오월을 향해 날아올랐다.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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