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빠르게, 조용하게 밀려온 그날들이 앞에 서있었다
살다 보면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들이 있다. 병, 이별, 죽음,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마주하게 되는 '나이'라는 시간. 준비가 되었든 아니든, 삶은 그런 생각을 무색하게 만들며 흘러간다.
언제부터였을까. 나이가 들수록 삶은 그런 일들을 순서 없이 받아들이는 법부터 가르쳤다. 애써 외면하지도,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이런 일도 오는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방식으로 나이를 먹어갔다. 아프고 서운하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익숙해지는 감정, 그게 60대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불사조처럼 살아간다. 신화 속 존재처럼, 어지간한 불행 앞에서도 “나는 아니겠지”라는 기대를 품는다. 그 뻔뻔스러움이 없다면 삶을 견디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모든 일이 내게도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무력감이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 여긴다. 그 나약함이 삶을 붙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때때로 잊어야 할 것들을 잊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요즘은 그 익숙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나약한 감정을 고스란히 마주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때로는 그런 나 자신이 싫고, 그 감정조차도 증오스럽게 느껴진다.
문득 친구들과 예전에 퇴직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내 인생에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일, 언제나 남의 일처럼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새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그리고 조용하게 찾아온 시간이다.
50대 중반까지 나는 내 나이를 젊게 보았다. 나만은 다를 거라고 믿었다. 거울 속의 내 모습도 그렇게 늙어 보이지 않았고, 마음은 여전히 40대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젊음을, 건강을, 시간의 속도를 얕잡아보았던 자만이 허망하게 무너진 순간이었다.
요즘은 또 다른 두려움이 생긴다. 어느 날 누군가 나를 ‘할아버지’라 부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체념할까, 허탈할까, 아니면 그저 웃어넘길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린다. 시간이 누구도 예외 없이 데려간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나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작은 바람을 놓지 못한다.
그 마음이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기에 품고 살아간다. 그 마음 없이 어떻게 60대의 시간을 건너갈 수 있을까. 결국, 시간은 우리가 도망칠 수 없는 파도다. 조용하지만 거침없고,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해도 아랑곳없이 다가온다.
지금 나는 60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가끔은 멍하다.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줄 몰랐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이런 순간들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것이고, 나는 그것들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억지를 부려 본다.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날 희망 하나를 마음속에 품고, 예상보다 빠르게, 조용하게 밀려드는 시간을 맞이하며 나의 하루를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