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인근 공원에 한글로 새겨진 시 한 편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잔잔한 산책로와 조용한 숲길,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와 물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이곳은, 한적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주는 곳이다.
2015년, 나는 아내와 함께 이 공원을 처음 찾았다. 산책하던 중 '아시안 베드(Asian Beds)'라는 표지판을 보고 길을 따라가다, 그곳에서 한글로 새겨진 시비를 처음 만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큼직한 돌. 그 위에 새겨진 시의 제목은 「나는 그저 물이면 된다」였다. 가까이 다가가 시를 읽는 동안, 한 구절이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목마른 자의 컵에 담겨지고
공장의 기계를 돌리고
청소부의 걸레를 빨고
그래서 하수가 되던지
나는 그저 물이면 된다.”
그날, 낯선 타국 땅에서 익숙한 언어로 만난 시의 한 문장이 내 마음을 깊이 울렸다. 한참을 시비 앞에 멈춰 서서, 시의 여운을 곱씹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리고 오늘,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시 그 공원을 찾았다. 산책길은 여전히 평온했고, 그 시비 역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그 시 앞에서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조용히 화면을 켜고, 다시 한번 그 시를 천천히 낭송했다.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하고 예를 갖추듯, 나 역시 시 앞에서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날의 감동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해외에서 살아가다 보면, 익숙했던 것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코스트코에서 발견한 한국 김치, 중고 매장에서 우연히 본 전통 탈처럼, 이 시비는 내게 또 다른 방식으로 다가오는 ‘귀향’이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누군가의 시 한 편이 이국의 공원 한가운데에서 낯선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존재의 이유가 아닐까.
그리고 이 시비는 단지 누군가의 문학적 성취를 넘어, 우리 이민자들에게 조용히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