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는 오늘도 여전히 비가 내린다. 유난히 겨울이 긴 나라 캐나다, 그 이유는 바로 비에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어둠이 더 빨리 찾아와 밤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어쩌면 비는 밴쿠버 겨울의 상징과도 같다.
나는 전형적인 한국 스타일의 애주가이다. 비 오는 날이면 얼큰한 국물 요리에 소주 한잔이 절로 떠오르곤 한다. 오늘 아침부터 가늘게 내리던 이슬비는 점차 창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거센 비로 변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분주한 움직임은 저녁 식사를 위한 준비가 한창임을 알려준다.
한국이었다면 비 오는 날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마다 근처 식당으로 발길을 옮겨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외식보다 집에서 직접 요리를 만들어 먹는 일이 더 잦다. 오늘 저녁 식탁에는 펄펄 끓는 감자탕이 올라왔다.
감자탕은 아내가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요리 중 하나이다. 밴쿠버에서는 감자탕 고기를 대신할 재료로 삼겹살을 사용해 보쌈과 감자탕을 병행해서 만들기도 하고, 오늘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갈비를 활용해 특별히 감자탕을 준비했다. 우거지가 아닌 배추를 넣어 만든 국물은 깊고도 특별한 맛을 더해준다. 사실 이 맛은 전문점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아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정말 맛이 있다.
한국에서는 비 오는 날마다 음식과 함께 술 한잔으로 분위기를 즐기곤 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이런 날을 맞이하기 쉽지 않아, 집에서 직접 한국의 맛을 재현하며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밴쿠버는 다양한 문화를 품은 도시라 한식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지만 비 오는 날에는 여전히 얼큰한 육개장, 부대찌개, 따뜻한 삼계탕 같은 한국 요리가 더욱 간절해진다. 요즘은 한인 마트에서 거의 모든 식재료를 구할 수 있어 고향의 맛을 재현하기 한결 쉬워졌다. 이런 소소한 시도가 한국의 정서를 잃지 않고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되어 준다.
밴쿠버의 비는 때로는 지독할 만큼 외로움과 그리움을 안기지만, 동시에 잔잔한 사색의 시간을 선물한다. 비 오는 날, 뜨끈한 감자탕 국물과 한 잔의 술은 나에게 작은 위안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이렇게 밴쿠버에서 만난 비와 함께 감자탕 한 그릇은 단순한 식사를 넘어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