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머물던 주제와 기억에 남은 장면들
여성과 남성의 성별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없다면, 트랜스 젠더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바꿔야 할 성적 역할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트랜스 과정이 불필요해지기 때문. 성차별과 이분화된 질서 안에서는 불가능한 기반에 가까우므로, 현실을 토대로 한 개인의 선택과 사회적 합의가 맞물려 이루어져야 한다.
타고난 성별이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첫째, 주어진 세상에 순응하며 이분법 성별 기준에 몸을 맞춘다. 성전환 수술이라는 물리적인 장치를 활용할 수 있다.
둘째,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젠더 해방이 된 세상을 위해 투쟁한다.
하지만, 모든 트랜스젠더가 투쟁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불가능함). 게이, 레즈비언, 혹은 여성들이 모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투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기에서 복잡하게 얽히는 문제는, 남성에서 여성이 된 트랜스젠더가 여성들의 일상을 위협하고 성취를 공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뺏어갈 수 있다는 위협감이다. 성중립 화장실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아직 요원한 현실
MTF에 대한 위협감이 깔린 여성들의 심리적 위험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나 탐구하고 싶은지점, 그리고 더 나은 논의로 이끌 이야기가 가능한 지 타진해보고 싶다. 어떤 특정의 개인들을 집단화할때 느끼는 괴리 혹은 위화감은 내가 아는 개인과 다수의 무리지은 성격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시선 사이에 존재한다. 극단에 있으면 모두 오류가 발생할 수 있어서 입을 다무는 편이 쉽다.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할 것인가,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방관하지 않는 방식은 무얼까.
-부모와 자식, 끝나지 않는 무한고리
전시 종료 하루 전, 1월 3일에 호암미술관에 들러 보게 된 <덧없고 영원한>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의 폭력과 여성에 대한 멸시를 겪고 자란 루이즈 부르주아는 결혼이라는 수단으로 도망치듯 다른나라 미국으로 와서 왕성한 예술활동을 했다. 70대에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얻었으며 99세였던 2010년에 영면했다. 그녀의 그림과 설치작업들을 쭉 보면서, 고통이 점차 전이되다가 1974년 작 <아버지의 파괴>에 이르면서 몸서리났다. 드로잉 작업들엔 붉은색이 많이 쓰였는데, 1994년 작<붉은 방(부모)>에서는 빨강은 불안과 위태로움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예술가들의 덕목 혹은 고통은 매몰된 생의 어떤 지점에서 쉽게 벗어나지 않고 더 깊게 아래로 파고드는 특성이라는 생각을 종종한다. 루이즈 부르주아 또한 자신의 상처를 끊없이 되새김질하면서 결코 용서하고 화해할 수 없는 가족의 폭력을 생에 대한 의지로 표출해나갔다는 위대함이 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아는 이상, 예술적 성취는 위대함 너머에 존재한다. 그리고 가부장제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이 작품들이 더 이상 루이즈 부르주아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선언할 수 있다.
그녀가 남긴 노트에서 나의 일기장으로 옮겨온 글이다.
"당신은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는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는 신뢰와 사랑이다"
-무대 위에 박정민 처음본 날
책을 원작으로 하는 공연이나 영화의 경우, 책에 깊이를 따라가는 작품을 찾기 힘들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아직 원작 도서는 읽지못했고, 영화는 두번을 보았다.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무대로 어떻게 구현되었을까하는게 가장 큰 호기심이었고, 마주한 공연은 이상하리만큼 생동감이 있었다. 이상하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동물 자체가 움직이는게 아니라 동물 탈을 쓴 배우들이 움직임을 표현하는 방식이어서다. 호랑이의 몸통, 꼬리, 머리를 각기 다른 배우들이 담당하고 있는데, 보기에 거슬림이 없었다. 동물들 뿐 아니라 자연현상도 관객들이 그럴듯하게 느끼게 만들어야하는 부분인데, 몰아치는 폭풍우에서 떠내려가는 장면이나 물에 빠지는 상황은 파이를 연기하는 박정민의 움직임, 표정 등으로 설득이 된다. 이상하고 생동감이 넘치고 그로인해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몰입이 되었다. op석에서 보았는데, 전체적인 무대효과를 한 눈에 보기는 어려웠지만, 배우의 감정을 느끼거나, 세부적인 공연장치를 파악하는건 좋았다.
왜 같은 공연을 여러번 보게 되는 지 너무도 잘 알겠다. 하지만 티켓팅이 자신없으니 여기까지 하기로합니다.
-연강홀 맨 구석 끝자리에서 본 후기
사실 <어쩌면 해피엔딩>를 브로드웨이에서 볼 날이 안올지도 모르니까, 한국에서라도 한번은 보자는 마음이었다. 모든 날짜가 매진이라 빈 자리를 찾느라고 엄청난 새로고침을 했고 운이 따라 연석을 잡게 되었다. 예술에 있어 대중성이란 무엇인지 톺아보면, 모두가 큰 편차없이 좋아할만한 내용을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내는 요령이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이 뮤지컬은 대중적인 코드에 유격없이 드러맞는 작품이라고 보는 내내 생각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뻔하고, 심심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예상대로 따듯하고, 다정하고, 슬펐다. 오케스트라가 협업하는 방식, 음악이 지닌 전반적인 톤이 주는 체온을 살짝 웃도는 온도가 너무 편안해서 공연이 이렇게 편해도 될까하는 질문이 들었다. 아마 이 엇나간 감정은 예술작품에 기대하는 '뒷모습'이 충족되지 않아서였을 것 같다. 뒤를 더 곱씹고 싶은데, 나는 이 뮤지컬에서는 그런 지점은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정직함과 따듯함이 강력한 무기인 작품이었다. 올리브와 클레어의 사랑은 물리적인 한계를 맞이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고, 관객은 이 이야기의 끝을 안다. 서로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기억을 지우자는 다짐과 함께 이별을 고했음에도,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혼자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끝내 울고야 말았는데 '이렇게 빤한데 운다고?' 혼자 되물으면서도, 감정의 틈은 이미 눈물이 끼어든 뒤였다. 맨 뒷자석 우측 구석에서, 쌍안경 대여없이 관극하는 바람에 배우들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아쉬움이다. 배우들의 표정이나 연기를 더 면밀하게 볼 수 있었다면 공연 전반부 몰입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박천휴 작가가 참 부럽다. 좋은 작품 하나로 오래 회자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낸 예술가라서, 정말 부럽고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