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가 사라진 한국, 혁신 없는 국가의 운명
얼마 전, 초등학생 4학년인 조카를 오랜만에 만났다. 요즘 학교생활이나 친구들과의 관계 등을 묻다가 조카의 장래 희망을 듣게 되었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듯, 자신의 꿈도 '의사'라고 하였다. 아직 세상에 때묻지 않은 아이의 순수한 대답에 미소가 지어졌으나, 마음 한편이 씁쓸해짐을 막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의 '성공'이라는 단어가 의사라는 하나의 직업과 동의어가 되었을까.
https://youtu.be/yE9-ENNbXsU?si=Qz-fB2df5yWMfpI0
얼마전 KBS에서 방영한 '인재전쟁' 다큐멘터리는 대한민국 대다수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여러 커뮤니티에선 7세고시, 황소고시 등을 비롯한 각종 우리나라의 기이한 의대 쏠림 현상에 문제가 있음을 토로했고,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15/0005175877?sid=102
그런데 현실은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떠드는 건 그저 말뿐이었던 걸까. 8월 26일자 기사에서는 올해 수능생들이 효과적으로 의대를 가기 위해 사탐런 등의 입시전략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수능생보다는 그 수능생들의 부모님들이 주로 전략을 세움) 겉으로는 의대쏠림 현상을 비난하며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척'하나, 실제 행동은 자기 자식은 의사를 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행태를 보여주는 이 기사는 우리의 진짜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의사가 된다는 건 단순히 소득이 높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곧 안정된 생활, 사회적 존경, 예측 가능한 미래를 의미한다. 다른 직업이 불확실성과 모호함으로 가득할 때, 의사는 합격의 순간부터 인생의 궤도가 거의 보장된다.
공학도는 수년간 연구한 기술이 사장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창업가는 단 한 번의 실패로 재기 불능의 나락에 떨어진다. 반면 의사는 합격 통지서 한 장으로 적어도 '실패하지 않을 삶'을 보장받는다. 사람이 미래의 위험을 계산하는 동물이라면, 이보다 더 합리적인 선택이 어디 있겠는가.
임마누엘 칸트가 말했듯 사람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계산하는 존재’이며,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만큼 그 정의에 충실한 이들도 없다. 자신의 미래 가치를 가장 확실하게 보전하고 불릴 수 있는 단 하나의 투자처, 그것이 바로 의대인 셈이다. 위험은 최소화하고 보상은 극대화된다는 측면에서 의대를 선택하는 건 지극히 합리적 선택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모든 개인이 '합리적'으로 움직일수록, 집단은 '비합리'라는 구렁텅이로 빠진다. 의사는 늘어나도, 국가 산업을 지탱할 엔지니어는 사라진다. 의료 인력은 특정 분야에 편중되고, 기술 인력의 공백은 커진다. 개인이 합리적일수록, 집단은 몰락한다. 구조의 모순이다.
니체는 말한다. "군중은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본능과 환경에 끌려다닌다." 지금의 입시 구조가 그렇다. 학생들은 자유롭게 진로를 결정하는 듯 보이지만, 사회가 주는 신호는 오직 하나다. 의사는 안정적이고, 고소득을 보장하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인 반면, 엔지니어는 불안정하며 보상도 상대적으로 저조하고, 사회적 존경은 커녕 대체 가능한 여러 명 중 하나라는 게 우리 사회가 보내는 신호다.
선택지가 사실상 하나뿐인 사회에서 자유란 허상이다. 자유는 다양한 가능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지금 한국은 그 가능성들을 하나씩 지워버린다. 학생들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구조에 떠밀려 단 하나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한편 쇼펜하우어는 "맹목적 의지"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다. 인간은 욕망을 따라 달리고, 그 끝에서 고통을 만난다. 한국 사회에서 그 의지는 집약되어 있다. 의사가 되는 것. 돈과 안정, 지위를 향한 욕망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몰리니, 사회 전체가 "의사 되기"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맹목적 의지는 집단 차원에서는 파괴적이다. 미래 산업을 지탱할 인재가 사라지고, 국가의 생존 기반은 약화된다. 개인의 욕망이 쌓여 집단의 파멸을 낳는 아이러니, 이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이다.
중국은 첸쉐썬과 같은 로켓 과학자를 인민 영웅으로 추대하고, '천인계획'과 같은 파격적인 정책으로 전 세계의 두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미국은 어떤가? 실리콘밸리는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일론 머스크나 젠슨 황처럼 세상을 바꾸는 '비전'을 가진 엔지니어와 창업가를 사회 전체의 아이콘으로 만든다. 그들의 실패는 낙인이 아니라 다음 도전을 위한 '훈장'으로 여겨지며, 사회 전체가 혁신가의 도전을 응원한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정반대다.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판 이공계 박사는 불안정한 박사 후 연구원(Post-doc) 신분으로 2~3년마다 연구실을 옮겨야 할 처지를 걱정하고, 대한민국 수출의 최전선에 있는 반도체 엔지니어는 40대면 명예퇴직을 준비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다. 평생의 소득을 기대했을 때,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가 벌어들일 수입조차 개원 전문의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금의 한국은 "4차 산업혁명"과 "기술 혁신"을 슬로건으로 외치지만, 정작 시스템이 개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섬뜩할 정도로 명확하다. "(한국에서의) 이공계의 길 끝에는 보상 없는 불안정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누가 감히 자녀에게 '도전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구조가 개인의 목을 조르는데, 개인이 홀로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버티라고 하는 것은 명백한 기만이다. 모든 신호가 '의대로 가라'고 외치고 있는데,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비합리적인 사회가 된 것이다.
물론 개인에게 성찰은 필요하다. 나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적 불합리를 낳는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자. 개인의 의식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인간은 자기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집단은 그 생존 본능의 합으로 굴러간다.
의대 블랙홀은 교육 문제나 세대의 이기심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합리적 개인이 어떻게 집단의 파멸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지에 대한 구조적 아이러니이며, 동시에 국가의 철학 부재가 빚어낸 참사다. 개인의 성찰을 요구하기 전에, 국가가 시스템으로 답해야 한다. '엔지니어가 영웅이 되는 사회'는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제도로 설계되어야 한다.
첫째, 단기적으로는 파격적인 보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기술 기반 창업에 대한 법인세를 10년간 면제하고, R&D 투자 비용은 100% 세액 공제해주는 등 실패의 위험을 상쇄할 만한 직접적인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장기 R&D 프로젝트 예산을 법제화하고, 국가 핵심 기술 분야 인재에 대한 병역 특례를 의대 정원만큼이나 과감하게 확대하여 연구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보장해야 한다.
둘째,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인정과 문화를 바꿔야 한다. 초중고 교육과정에서부터 코딩과 과학 지식뿐만 아니라, 기술이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를 가르치는 '기술사(技術史)'와 '기업가 정신' 교육을 의무화해야한다. 정부는 '이달의 엔지니어상'과 같은 상의 권위를 대통령상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언론과 미디어는 이들이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을 아이돌 스타처럼 조명할 필요가 있다. 실패한 창업가가 빚더미에 앉아 재기 불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자산으로 삼아 다시 도전할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창업가 펀드'를 활성화하는 것 또한, 도전을 존중하는 사회적 신호가 될 것이다.
결국 이 싸움은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국가의 설계 의지에 달려 있다. 엔지니어의 도전이 의사의 안정성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존경과 보상을 받는 사회 구조를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두 합리적으로 각자의 생존을 도모하면서 국가 전체의 몰락을 향해 걸어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자유도, 미래도,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