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MBTI를 다시 보다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요즘 들어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거의 항상 나오는 질문인 것 같다. MBTI가 본격적으로 유행한지도 벌써 2~3년은 지난 것 같은데 말이다.
MBTI가 한창 유행일 때, 정작 나는 MBTI를 믿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편이 맞겠다.
사람을 네 글자로 구분한다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었다.
내 삶은 더 복잡했고, 사람은 언제나 예외투성이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관계에서 작은 균열이 생겼다.
나는 논리로 갈등을 풀어내려 했고, 상대는 감정으로 다가왔다.
나는 차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취조를 받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은 내게 낯설게, 그리고 다소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 내가 건넨 언어가, 누군가에겐 압박과 상처가 될까?
그때서야 나는 MBTI를 떠올렸다.
내가 T(사고형)라면, 상대는 F(감정형)이었을 것이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서로 다른 창을 통해 바라본 것이다.
나는 문제의 구조를 따져 해결하려 했고, 상대는 나의 마음을, 우리의 관계를 확인받고 싶어 했다.
둘 다 틀리지 않았지만, 우리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우리가 같은 풍경을 본다고 해서 같은 것을 본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물체를 바라볼 때는 각막과 수정체, 망막과 시신경의 상태, 심지어 당일 컨디션에 따라 각자가 받아들이는 색감과 질감, 온도가 다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물체를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차이가 극명한데, 어떤 문제나 사건에 맞닿뜨렸을 때엔 어떠할까?
T는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는 데 시선을 두고, F는 그 문제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눈길을 준다.
J는 계획과 구조 속에서 안정감을 얻고, P는 열린 가능성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마치 서로 다른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처럼, MBTI는 우리의 시각적 필터에 가깝다.
MBTI를 접하고 보니 그제서야 조금 이해했다.
내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을 논리의 언어로 해석하는 데 익숙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대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을 감정의 언어로 이해하는 데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 차이를 모르고 대화하면, 상대는 늘 이해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차이를 언어화하면, 비로소 다름을 인정할 수 있다.
"아, 저 사람은 다른 창으로 세상을 보고 있구나."
이 한 문장이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그렇다고 MBTI가 사람을 고정시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역할을 경험하고, 그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도 변한다.
사회 초년생일 때는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계획(J)을 붙잡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유연함(P)이 더 소중해질 때가 있다.
어릴 때는 외향적(E)으로 보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내향적(I) 휴식이 더 필요해지기도 한다.
그 변화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다.
렌즈는 상황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오래 쓰다 보면 색이 바래기도 한다.
그러나 에너지의 근원 같은 깊은 부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결국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만 다시 충전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듯이.
물론 MBTI 하나로 인간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주는 작은 도움은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이제 어떤 상황에서 갈등이 생기면, 먼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렌즈는 무엇일까?'
그리고 상대방을 떠올리며 다시 묻는다.
'저 사람은 어떤 렌즈를 쓰고 있을까?'
이 두 질문만으로도 대화의 온도가 달라진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상처를 줄일 수 있고, 상대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MBTI는 나와 타인의 차이를 비난이 아닌 언어로 바꾸어주는 도구다.
하지만 이 편리한 언어에 너무 의존하게 될 때, 우리는 가장 경계해야 할 함정에 빠지게 된다.
MBTI는 그 사람을 보는 여러 도구 중 하나인 것이지, 족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던 이 네 글자는 어느새 상대를 손쉽게 판단하고 재단하는 낙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너는 I니까 사람 많은 곳은 당연히 싫겠네."라며 상대를 배려하는 척 그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역시 너는 P니까 계획성이 없구나."라며 실수를 성향의 문제로 치부해버린다.
심지어 'ENTJ는 독선적이다', 'INFP는 사회 부적응자다' 와 같이 특정 유형에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우고 조롱하는 일까지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더 이상 다름을 이해하는 노력이 아니다. 그 사람의 복잡한 내면을 납작하게 눌러 정형화된 틀에 가두고, '다름'을 '틀림'으로 만드는 폭력에 가깝다.
우리는 누구나 복합적이고,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을 가진다.
MBTI는 그 복잡한 인간 내면의 일부를 비춰주는 창일 뿐, 결코 인간 전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MBTI는 이해의 언어가 아니라 오해의 도구로 변한다.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창문을 하나씩 달고 살아간다.
어떤 이는 그 창으로 빛을 크게 받아들이고, 또 어떤 이는 작은 틈새로 조심스레 세상을 들여다본다.
MBTI는 그 창이 어떤 색을 띠고 있는지를 잠시 비춰주는 거울에 가깝다.
중요한 건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같은 창이라도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따라서 MBTI는 우리를 가두는 이름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선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나는 이제 이렇게 정리하려 한다.
MBTI는 성격을 규정하는 도장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드는 작은 창이라고.
요즘처럼 갈등이 많은 시대에서 MBTI가 누군가를 프레임에 가두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역할을 하기보다 서로를 좀 더 깊게 이해하고, 좀 더 넓게 바라봐 주는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젠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의 MBTI는 무엇인가요?"가 아니라,
"당신은 지금 어떤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나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창은 어떤 풍경을 비추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