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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라는 소개가 불편합니다.

새로운 규칙, 다른 서울 #29_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김선기

'그냥 연구자' 아닌 '청년'인 '연구자'  


20대 초반부터 '청년'담론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어요. 연구활동을 계속 해오다보니 어느새 제 앞에 '청년연구자'라는 소개가 붙더군요. 저는 이 '청년연구자'란 단어를 볼 때마다 좀 불편한 감정을 느껴요. '청년을 연구하는 연구자'라는 뜻은 당연히 좋은데, '(나이대가) 청년인 연구자'라는 뜻이 같이 읽히기도 하거든요.  


이 단어를 저에게 붙인 건 기자나 기획자분들이었는데요. 저를 단순히 “어떤 대학에서 어떤 전공의 박사과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그분들에게는 부족한 느낌을 주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저는 '학자'나 '연구자'라고 했을 때 흔히 떠오르는 기성세대의 인물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남성 연구자'나 '기성세대 연구자'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것처럼, '여성 연구자'나 '청년 연구자'라는 말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을까요? 


청년이라고 다 '같은 청년'일까요? 


청년이라는 말이 어떤 이를 소개하는 '특별한' 문구로 사용된다는 건, 사회가 청년인 사람들에게 어떤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말과 같아요. 다시 '청년연구자'로 예를 들어보면, 청년이니까 아직 완전한 연구자는 아니야, 청년인데 벌써 연구를 하다니 기특해, 이런 식의 의미가 생기잖아요.  청년을 향한 이런 의미부여는 대부분 청년의 '연령층' 때문에 생기죠. 이 사회에서 '청년'이란, 보통 젊은 연령대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묶어서 부르는 것이니까요. 가령 누군가를 청년이라 부를 땐 '아직 어릴것이다', '패기가 넘칠 것이다' 등 젊은 나이에 대한 기대도 자연스럽게 따라오죠.  


그런데 청년에 대한 이러한 '연령 중심의 사고'가 청년 개개인의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다시 말해 '청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연령과 분리시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보통 “청년들이 이렇다 혹은 저렇다”하며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다양한 개인들을 연령대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같은 청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그 속의 개인들은 모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죠. 성별, 지역, 계급 등. 뿐만 아니라 이 정체성에 따라 개개인별로 처해있는 상황도 다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같은 '청년'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중의 누군가를 청년을 대변하는 이로 꼽아낼 수 있는 걸까요? 


가령 '연소득 천만원 블루칼라 남성 청년'의 이야기와 '연소득 2천만원 화이트칼라 여성 청년'의 이야기 중 무엇이 '청년'의 현실에 더 가까운 것일까요? 둘 중 어떤 이야기가 청년을 대표할 수 있는 이야기일까요? 그것을 우리가 임의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안되겠죠. 합리적인 대화를 통한 합의가 필요할 뿐이에요.  


그래서 어떤 청년당사자가 스스로 '청년을 대변'하고자 할 때도 꼭 필요한 게 있어요. 내가 모든 청년들을 대변할 수 있을까? 많은 청년들 중 나는 '어떤' 청년일까? 나와 다른 성별, 다른 계급, 다른 지역의 다른 청년들과 나는 어떻게 다를까? 최대한 고려하고 성찰하는 것이죠.  


같은 연령대를 공유하고 있다고 다 같은 '청년'이라고 쉽게 상상하지 않는 것. 즉 '청년'은 단일한 특성을 가진 집합체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것. 이게 '청년'을 연령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첫 걸음이라 할 수 있죠.  


우리가 “다르다”는 건 왜 중요할까요?  


청년 개인들의 이러한 이질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청년을 위한다는 정책설계는 오히려 '세대 내의' 격차와 불평등을 강화시킬 수 있어요. 혹은 '청년을 대표'한다는 청년당사자의 이야기가 오히려 기존의 정치/행정에 유리하게 이용될 수도 있죠.  


한창 떠들썩했던 '20대 남성' 이슈가 그런 경우였죠. 최근 몇몇 정치인과 언론이 '20대 남성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상조하며 그들의 발언에 일정한 권위를 부여했죠. 저는 이 과정 상의 일반화를 지적하고 싶어요. 청년 개개인을 묶어 동질적인 집합체로 생각해서는 안 되듯, 동질적인 집합체로 여겨지는 '20대 남성 당사자' 또한 실체 없는 개념이라 생각하거든요.  


연령이 20대인 성별이 남성인 사람이 모여 평균값이 도출된 것 뿐인데, 이것이 정당 정치 논리에 유용하게끔 취사선택되고 편집된 거예요. 그래서 지나치게 극단화되고, 가시화되고, 정치적으로 이슈화된 거고요. 그 과정에서 청년 내부의 다른 목소리들은 묻힐 수 밖에 없었어요.  


반대로 이에 대응하는 '20대 남성의 보수화'라는 이슈도 마찬가지죠. 20대 보수화는 기성세대 중심의 진보진영에서 끊이지 않고 제기된 이슈지만, 사실 이것도 동질적인 집합체로서의 20대를 상상하고, '20대 들은 모두 진보적'일 거라 생각한 데서 나온 오류에요. 이런 관점으로는 그 20대들에게 어떤 비전도 제시할 수가 없겠죠.  


“새로운 규칙”이 필요한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청년'개념을 연령으로부터 분리시킨 새로운 '청년세대론'이에요. 물론 현재 한국사회의 여러가지 조건을 보면,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새로운 스피커가 성장하고 등장하기는 힘들겠지요. 기본 환경부터 바꿔나가야 해요.  


최근에는 이러한 맥락에서 '청년학회', '새로운 규칙 포럼' 등을 진행했어요. 다음 사회를 고민하는 젊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사회로 발신할 수 있는 장, 그리고 그러한 야심을 가진 주체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었죠.  


청년이 스스로 '청년을 대변'하는 행위를 윗 부분에서는 조금 비판적으로 이야기했는데요. '다음 사회를 위한 새로운 발화자'를 발굴하고, 그들의 발화기회를 넓힌다는 관점에서라면, 청년을 대변하는 청년 당사자의 이야기가 충분히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봐요.  실체 없는 '청년'을 대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스피커, 새로운 당사자들에게 사회적 발화의 기회를 얻게 하는 것. 지금 한국 사회에 '청년'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죠. 



기획·편집_청년자치정부준비단

인터뷰·글_한예섭

사진_김재기


세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규칙들로 가득하다. 1980·90년대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준, 과정, 결과들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 관성을 넘어 다른 시각으로, 기성세대가 이끄는 룰에서 벗어나 보다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나가는 ‘빌더’들이 있다. 우리의 삶과 세상에 크고 작은 균열을 가져올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서핑과 위스키만으론 바뀌지 않는 당신의 삶에, 어딘가 색다른 균열이 생기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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