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서울청년시민회의 평등다양성분과 전승우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가족은 ‘정서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사람들의 소집단’이에요. 꼭 혈연으로 이루어진 관계만이 가족이 아니라,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상대를 어느 정도 책임져 줄 수 있는 관계라면 바로 그게 가족이란 이야기죠.
‘가족구성권’이란, 내가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에요. 동시에 관계를 ‘쉽게 해체할 수 있는 장치’도 여기에 포함되어야 하죠. 가족을 자유롭게 구성하려면, 가족을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나 돌보기를 원치 않을 때, 어떤 선택을 내리는 것이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가족구성권’에 대해 인지한 건 10년 전이었어요. 2009년 겨울에, 대안 교육단체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위주 주거공동체에 들어가 1년 반 정도 살았거든요. 당시엔 가족 구성권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살며 부대끼는 동안 ‘가족’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죠. 전통적 가족의 관점에서 보면 가족이라 부르기 어렵지만, 단순히 친구라고하기엔 친밀하고 끈끈한 이 관계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혼란스러웠거든요. 그곳을 나온 뒤에야 제가 ‘다른 형태의 가족’을 경험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함께 살아도, 가족이 될 순 없었던 순간들
최근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법이 인정하는 가족 외의 ‘다른 형태’가 필요하다는 걸 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어요. 얼마 전까지 몸이 좋지 않은 친구를 돌보기 위해 친구 집에서 함께 살았거든요. 친구가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에 가거나 입원해야 할 때, 절차상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한데 병원에선 직계 가족만 보호자로 인정하는 거예요. 함께 사는 저는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직계 가족은 바로 올 수 없는 상황이니 결과적으론 입원에 동의할 보호자가 없는 상황이 된 거예요. 위험한 순간이었죠.
함께 사는 사람이 원가족과 문제가 생겼는데, ‘가족’이 아닌 저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무력감을 느낀 일도 있었어요.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다면 제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요. 실제로 가족처럼 살아감에도, 사회가 말하는 전통적 가족엔 속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험을 반복한 거죠. 이런 경우, 우리가 제도 안에서 동반자 관계로 인정받았다면 충분히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을 거예요. 가족구성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필요한 권리라는 걸 느꼈죠.
다른 형태의 가족, ‘제도’가 인정해 줘야죠.
그래서 가족구성권을 말하다 보면,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안(이하 생활동반자법)’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종종 생활동반자법을 ‘동성혼’에 관한 법률로 생각하시곤 하는데요. 사실 이 법은 동성혼보다도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는 법이에요. ‘혼인 관계 이외의 동반자 형태’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렇죠. 물론 아쉬운 점도 있어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개인과 개인을 가장 강하게 묶는 계약은 법률이 인정하는 결혼이라고 생각하는데, 결과적으로 생활동반자법은 법률혼보다 하위 개념으로 취급되거든요.
게다가 ‘관계 형성하기’를 넘어 ‘관계 단절하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해요. 한국사회에서 가족관계를 단절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우선 이혼만 봐도 절차가 복잡하고, 책임소재가 있는 쪽에서 이혼을 안 해주겠다고 버티면 답이 없기도 해요. 심각한 가정폭력으로 당장 관계단절이 필요한 경우는 어떨까요? 가정폭력 피해자가 집을 떠나 쉼터에 있을 때, 쉼터 주소는 가족관계등록부에 등록돼요. 그런데 가해자인 다른 가족이 이 주소를 조회하는 걸 막을 방법이 현재엔 거의 없어요. 결국 현재로선 누군가 새로운 가족을 꾸리고 싶어도, 이전에 맺은 관계를 끊는 일부터가 막혀있는 상황이죠.
생활동반자법에 대해 말하면 ‘아직 이르지 않나’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요. 그런데 가족구성권이나 생활동반자법은 이미 2000년대부터 꾸준히 논의되어온 이야기들이에요. 우리가 몰랐을 뿐 새로운 가족에 대한 요구는 늘 있었던 거죠. 아직은 우리 사회가 정상가족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저는 이 환상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 2~3년 내에 생활동반자법 이야기 특히나 크게 이슈가 된 것처럼. 다만, 왜 시간이 지나서 풍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환상이 지금 당장 만들어내는 피해자들은 어떡하죠? 그 환상 때문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은?
그동안 가족구성권 관련 법안 발의는 번번이 무산돼왔죠. 내년에는 정말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정책안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어요. 주로 언급되는 성소수자나 청년 비혼 여성 가족구성권 외에도 조금 더 많은 모델이 알려졌으면 좋겠고요. 예컨대 한부모 가정이나 다문화 가정은 가족의 형태로 인정은 받지만, 여전히 ‘정상적인 가족이 아니’라는 시선을 받고 있잖아요. 이런 가정들도 정상가족 환상에 의한 사각지대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든 사회적 연결에 의해서든, 점점 생겨나고 있는 노년층의 가족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죠.
어느 누구나 가족이 될 수 있도록
개인적 바람으로는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이하 청정넷)’ 내에서 정책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올해 조례안을 만들다가 결국 실패해서 제출하지 못했거든요. 청정넷에서 올 한해 활동해보니 가족구성권 문제는 장기적으로 가져갈 사안이더라고요. 작년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개최한 ‘유권자정치페스티벌’에 다른 활동으로 참여했는데, 그때 배정받은 라운드 테이블에서도 가족구성권 얘기를 했어요. 청정넷 관련 활동이 아닌 다른 활동에서도 최대한 이슈를 녹여내려고 노력 중이에요.
저는 지금 혼자 살고 있지만, 계속 누군가와 결합하고 분리되면서 살아가지 않을까 짐작해요. 물론 어딘가에 정착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모르는 거죠. 그리고 이건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내가 원하는 사람과 만나서 원하는 형태의 가족을 꾸리는 것,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꿈꾸는 최종 목표잖아요. 가족구성권은 누구나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권리에요. 자유롭게 가족을 꾸리고 살기에는 지금의 ‘정상가족’ 관념이 문제가 되니, 그것부터 짚어보자는 거죠.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인터뷰 프로젝트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이하 서울청정넷)에서 2019 서울청년시민회의를 통해 활동하고 논의해온 내용을 나눕니다. 서울청정넷은 청년시민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참여기구로 청년문제를 비롯한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발굴 및 제안, 캠페인, 공론장개최 등 다양한 사회적해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글. 강다은/ 편집. 한예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