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님의 기일이었어. 손끝이 시려 습관적으로 따뜻하고 포근한 곳을 찾았지. 호주머니에 절반 이상 들어간 손은 깊이를 모르는 곳으로 하염없이 들어갔어. 손끝이 시리다 못해 아프다는 핑계로 장바구니 대신 비닐봉지를 차례대로 손목 위에 감으며 상차림에 올려질 음식 재료들을 순서대로 구입했지.검정 비닐봉지가 양손 가득 휘감자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어. 불편한 마음을 차가운 입김에 몽땅 실어 보냈고 걸음을 바쁘게 옮기는 중이었지. 계획된 음식을 순서대로 준비하느라쫓기던 마음에 생각보다 한눈팔기 어려웠어.
그런데 그 아이들이 내 눈을 끌었지 뭐야. 단팥이 통통히 들어 있고 겉이 바싹한 붕어빵을 허기진 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었어. 달달한 팥의 감칠맛에 빠져 한입, 두 입 먹다 보니 바싹한 꼬리와 등지느러미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어. 배속 어느 언저리에서 잘 퍼진 따뜻한 팥이 몸 전체로 퍼지며 예민함이 덜해졌고 마침내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어. 조금 채워진 허기와 아버님이 좋아하셨던 음식을 준비할 마음에 누군가를 추도하고 기릴 수 있는 그 마음이 거룩하게 느껴졌지 뭐야. 그때부터 거룩한 그 일에 몰두하기로 했어. 함께 할 수 있는 든든한 내 자리를 자랑스러워하며.
밑간을 하고 계란을 풀고 밀가루를 골고루 입히고 적당한 중불에 노릇노릇 잘 붙여진 세 가지의 전과 삼색의 나물, 과일과 생선, 산적, 닭등 추도를 목적으로 지금 음식을 준비하는 행위들을 하고 있어. 그러다,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왜.. 음식들을 모두 홀수로 준비해서 상차림을 해야 하는 걸까. 색과 상차림의 양식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의식처럼 정해진 걸까. 단지 유교의 의식으로. 아버님과의 추억을 기리며 진정으로 마음을 담아 추도하는 이 자리에서 중요한 건 과연 뭘까하고.
추도의 시간, 의식적인 건 아니지만 일을 끝내고 좀 늦게 도착하신 분들까지 모두 함께 모이자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추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 그 과정에서 상차림을 보며 내 시선에 들어온 상을 차려낸 형태와 추도의 마음이 섞인 순간을 문학 작품으로 그려냈고 그들의 시선을 통해 각자 자각하는 세상의 게슈탈트가 있었지. 말 그대로 그건 공통으로 만들어낸 작품이었고 문학이었어. 형태로 드러난 상차림에 아버님과의 추억과 사랑으로 그리움과 추도의 맘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그런데, 게슈탈트가 순식간에 붕괴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나의 시선과 마음처럼 그곳에 모인 각자가 느끼는 추도의 마음과 현실로 드러나는 상차림의 형태는 다 다를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의식의 순서가, 누군가에게는 상차림에 올려진 음식 색깔이, 음식의 종류가, 누가 먼저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며 여기저기서 뱉어내는 말은 소리로 분사되어 내 의식을 분열시켰어. 소리가 되어버린 그 말들은 단어 하나하나로 허공을 떠다니며 작품으로 보았던 오늘 추도의 마음이 낱낱의 단어가 되어 분산되는 것처럼 보였어. 내 시선에서 주변은 하얗게 보였고 어질어질하더니 곧 온몸에서 열이 났어. 설거지를 하는 내내 자신과 의식이 다투는 중인지 내면이 갈등을 겪고 있는지 몸 전체를 휘감은 식은땀은 범벅이 되어 버티던 나를 주저앉게 했어. 바로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욕실로 향했어. 거울에 비친 열기를 감추거나 술길 수 없었던 그 얼굴에서 낯선 모습이 보였어. 거울 속에 있는 타자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지. 그 순간 나는 거울 속에 있는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며 버릴수 있었어. 그것이야말로 문학에서 단어로 의미로 알던 게슈탈트 붕괴였을까.
내가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타자를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건 내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가능한 걸까. 본연의 나를, 고집과 집착이 있는 자신을 조금씩 놓아야, 어느 순간 자신의 내면에 자기가 다 빠져나가야만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그건 곧 자신이 사라지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는 이렇게 정의해 보면 어떨까. 나 아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을 존중하고 과정을 공감하려 애쓰는 정도로. 타자의 입장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과정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 내면이 붕괴되는 그 과정에서도 내가 지키려 하는 건 누가 뭐래도 삶의 순간을 느끼고 돌아보는 거다. 직면한 내 삶의 매 순간을 치열하거나 한 발짝 떨어진 먼발치에서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