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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밀도

바다

by 무 한소

#잔잔한 바다(05)


월드컵 경기장을 축소해 놓은 듯 잘 다듬어진 잔디가 깔린 넓은 운동장에는 공허한 웃음소리만이 퍼지고 있었다. 다시 작은 울림과 정적은 수애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민이가 웃는 소리는 남편의 경직된 저음을 조금 더 높이 끌어올렸고 동시에 수애의 감정도 평소보다 경쾌해졌으며 표면으로 드러났다. 두 사람은 배경과 인물과 소리의 조화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정신없이 뛰었으며 뒤엉켜 놀았다. 글을 쓰고 자신의 세계에 푹 빠져있던 수애가 봄바람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한 번씩 엉킨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봄바람은 수애의 손을 잡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바다는 햇살에 눈이 부실만큼 찰랑거렸고 꽃눈을 흩날리며 벚꽃이 내리는 곳으로 그녀를 다시 데려갔다. 수애는 눈부신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느꼈고 봄을 마음껏 숨 쉬고 마셨다.


그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주변은 그 어떤 방해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고요해졌다. 잠시 정적이 있었다. 좀 전까지 뛰어놀던 남편과 민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에 머물렀던 두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변 넘치는 고요함과 신선한 공기와 살랑이며 불어오는 봄바람이 그녀를 자꾸 자극한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두려운 기운이 몰려온다. 그녀는 공포로 두리번거렸고 흔들리는 눈으로 남편과 아이를 찾았다. “민아, 어딨니?” 대답이 없다. 더 깊은 정적이 이어진다. 고요함이 지나치게 깊어 그녀의 마음속 어느 곳을 거슬렸다. 알지 못하는 공포와 두려움이 현실이 될까 애써 외면했다.


수애에게 온전한 자유를 잠시나마 선물하려고 남편은 민이와 기억 속의 그 바다를 가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바다는 고요했다. 물결은 조용했고 거세게 몰려왔던 파도도 해안이 가까워지자 힘을 잃어 잔잔해졌다. 그때까지 우리는 바다에게 위안을 받았고 바다를 지켜주는 등대를 동경하고 있었다. 수애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바다를 사랑했고 신뢰했다.


그런데 수애가 그토록 의지하고 믿었던 바다가 아이를 데려갔다. 바다가 아이를 집어삼켰다. 잔잔함에 가려진 바다가 얼마만큼 잔인했는지 잊고 있었다. 수애가 잊고 지냈을 때 바다는 본색을 드러냈으며 그녀의 전부를 삼켜버렸다. 폭풍우와 같은 잔인한 그 일을 겪고도 일상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무심하게 다시 평소처럼 반복적으로 흘렀다. 너무나 평온하고 관조적 시선에서 바라보는 일상처럼.


양립할 수 없는 평행한 두 세계가 서로 등을 대고 있었다. 폭풍우가 있었고 그 아픔 이후에도 수애는 일상을 살아간다.


수애네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은 계획된 시간 속의 움직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갔다.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네 개의 바퀴를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다시 움직였다. 사실 누구 하나 수애와 남편에게 진심으로 괜찮은지 물어보거나 내면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었다. 수애와 남편 두 사람조차도 서로를 진심으로 살피지 못했다. 서로를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사라진 그 사고를 당한 이후, 변한 건 가족의 수와 남은 가족이 겪어내야 할 상실감이었다. 그들이 미처 준비 못한 트라우마와 맞서 싸워야 했다. 두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다, 5월... 같은 것들은 여전히 그들이 극복하지 못한,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 있기에 트라우마는 두 사람을 가장 나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남편은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음식을 먹었고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적어진 말을 대신해 주변 공기까지 바꿔 놓는 한숨이 늘었다.


수애는 자신의 자리와 노릇을 해내느라 남편은 스스로 겨우 잡고 있었던 위치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서로 내면의 아픔을 최선을 다해 애도하고 보듬어 줄 여유가 없었다. 부모가 되기에 그들은 너무나 미숙했다. 그렇게 안정감을 잃은 일상은 반복되었고 각자 자리에서 의무를 다하면 현실과 이상은 프레임이 깨지고 좀 더 가벼운 일상이 함께 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수애에게 결혼은 전환점이었다. 그녀를 성장하게 했던 시발점이 결혼이었다. 선택은 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이 했기에 결혼생활 대부분을 책임으로 온전히 감내해야 했다. 수없이 많은 모순과 상처를 견뎌야만 했다. 어쩌면 딛고 일어서지 않아도 되었는지 모른다. 삶의 결을 피하지 않고 흐름으로 타기만 해도 되었다. 지나치게 애쓰려다 오히려 꼼짝할 수 없었다. 성장과 변화를 위한 대가가 너무나 컸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돈의 속성을 쫓으며 삶의 방향을 여러 번 틀었다. 돈의 속성을 제대로 알기 시작하며 무너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병이 생겼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한 번도 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기에 병은 깊어졌다.


자신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감정을 참고 누르며 여러 날이 지났고 수애는 오늘처럼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남편이 아픈 그녀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묻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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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