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카사트가 본격적으로 인상주의 그룹에 합류하기 이전, 1860–1870년대에 걸쳐 이루어진 초기 선택들은 표면적으로는 개인적 취향이나 교육의 결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젤다 폴록은 이 시기를 단순한 전(前) 인상주의 단계로 축소하지 않는다. 그녀는 초기 카사트의 선택들이 이미 그 자체로 젠더화된 미술 제도 속에서 여성 예술가가 생존하고 발언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초기 카사트의 방향 전환은 사소한 취향의 변화가 아니라, 현실적 제약 속에서 가능한 예술적 실천을 탐색하는 전략적 조율이었다.
첫째로, 카사트가 미국에서의 초기 제도적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으로 향한 선택 자체가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이 이동은 단순한 유학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미술 제도가 여성에게 제공할 수 없는 전문 훈련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 밖으로의 탈주였다. 당시 여성에게 허용된 교육의 수준과 범위는 애초에 ‘전문 예술가’라는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에, 카사트의 유럽행은 기존 질서에 대한 묵시적 비판이자, 여성 예술가로서의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구조적 저항의 행위였다.
둘째로, 유럽 도착 이후 카사트가 선택한 작품의 주제는 당시 살롱 전시가 요구하던 ‘여성에게 적합한 장르’를 거스르는 방향이었다. 그녀는 안전한 장르인 꽃, 정물, 귀여운 아이들, 가정적 장면만을 선택하지 않았고, 오히려 역사화와 장르화 등 남성적 영역으로 분류되던 진지한 서사적 주제에 도전했다. 이는 그녀가 제도적 규범을 수용하지 않고, 여성에게 금지된 형식적 권위를 적극적으로 탐구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정치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도전이 결국 카사트를 제도의 주변부로 밀어냈다는 사실이다. 살롱 심사위원들은 그녀의 작품을 반복적으로 거부했고, 이는 단순한 미적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것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구조적 태도의 반영이었다. 카사트는 이에 좌절하지 않았다. 1877년 에드가 드가와의 만남을 통해 살롱 중심 체계를 벗어나는 또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 역시 단순한 미적 취향이 아니라, 공식 제도에서 배제된 여성 예술가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 플랫폼 구축의 정치학이었다.
셋째로, 초기 카사트의 이미지에서 나타나는 여성 인물들은 당시의 감상적 여성상과 분명히 다르다. 그녀는 여성의 감정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여성의 몸을 남성적 시선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그리지 않았다. 대신 여성을 관찰자 또는 행위자로 배치한다. 초기작에서도 여성은 독서하거나, 사유하거나, 관찰하며, 외부 세계와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이는 이미 이 시기부터 카사트가 남성적 시각체계에 대한 미세한 균열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폴록은 이 점을 특히 강조하며, 카사트가 인상주의에 합류하기 훨씬 전부터 근대적 여성 주체성의 형상을 실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넷째로, 초기 카사트의 선택에는 ‘자신의 관점에 충실하기’라는 일관된 전략이 존재한다. 당대 여성 예술가에게는 충성해야 할 기준인 도덕성, 적절함, 온순함이 암묵적으로 요구되었지만, 카사트는 이 요구에 충실한 작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칫 비판받기 쉬운 강렬한 표정, 신중한 손짓, 고요한 집중을 선택하며, 여성의 경험을 감정적 관습에 맞추어 축소하지 않았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예술적 개성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경험이 근대적 예술의 일부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선언적 실천이었다.
결국 초기 카사트의 선택 속에는 이미 명확한 정치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도 밖으로 이동하려는 용기였고, 제한된 교육 구조를 우회하려는 전략적 실천이었으며, 여성에게 부여된 이미지 규범을 거부하는 조용한 저항이었다. 폴록이 이 시기의 카사트를 단순한 ‘초기 탐색기’로 보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카사트의 초기 선택들은 이미 근대 여성 예술가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정치적이었고, 전략적이었으며, 동시에 근대 여성 주체성을 예술 속에서 구성하려는 첫 번째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