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연구

필립 거스턴의 회화 읽기

by 말하는 돌

“요즘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핑크빛이죠!”


위의 짧은 대화에서 핑크빛 삶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란 바다, 빨간 열매, 노란 꽃 등 같은 자연의 색에 대한 공통 경험을 기반으로 색채에 대한 보편적인 반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한 색이 포함된 언어들을 통해 감정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것 역시 역사적 시간을 가진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서 성장한 다수의 사람들은 각각의 색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공유하게 된다. 색채 언어의 의미는 어떤 색을 볼 때, 그 색채에 대한 고유한 인상을 기억하거나 색에서 추출되는 어떤 사물이나 형상을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때 특정 색으로부터 연상되는 이미지는 구체적인 사물부터 추상적인 개념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며, 그 이미지는 시각에 국한되지 않고 미각, 후각, 청각 그리고 촉각까지 연쇄적으로 자극하며 공감각적인 감정 반응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분홍색은 어떤 일반 의미를 갖고 있을까. 분홍색을 키워드로 연상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빨간색과 흰색의 혼합이라는 사실보다 사탕, 봄, 꽃, 아이와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달콤함, 향긋함, 부드러움, 따뜻함과 같은 감각 경험을 일반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언어들을 교차시켜 보면, 분홍색은 행복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생의 봄이나 따뜻한 마음, 달콤한 사랑 등의 표현은 그 수식어 자체가 분명히 행복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을 통해 분홍은 어린아이, 아름다움과 사랑,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핑크빛 하루’였다고 하는 말은 잊지 못할 만큼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색채는 이렇게 보편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은 각 개인에게 개별적인 경험의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동시에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감각과 분리될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감각하는 모든 분홍색이 동일할 수 없으며, 그에 대한 연상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피지 못한 꽃봉오리에도, 시들어 축 늘어진 꽃에도 ‘분홍색’이라는 단일의 색채 언어를 적용할 수 있지만,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다. 캐나다계 미국 화가인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 1913~1980)의 후기 구상회화 전반에 걸쳐 깊은 인상을 남기는 분홍색은 보는 이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며 특별한 경험을 선물한다. 1969년 제작된 연작에는 화가의 생각이 독특한 분홍색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의 1969년 작품 〈Town of edge〉는 넓은 화면을 가진 큰 작품이어서 다가서면 설수록 부분들로 나누어 볼 수밖에 없다. 탁한 하늘색으로 텁텁하고 거칠게 칠해진 바탕 위에 쌍둥이처럼 꼭 닮은 두 존재가 찰싹 달라붙어 자동차로 보이는 이동수단을 타고 있다. 그들은 못이 듬성듬성 박힌 엉성한 나무 막대, 단단하게 처리된 듯 보이는 막대, 그리고 붉은색으로 물든 막대까지, 세 개의 막대를 자동차가 터지기 일보직전임에도 자신들의 옆에 꾸역꾸역 끼워 놓았다. 분명한 설명이 제시되지 않은 두 존재의 모습은 어딘가 엉성해서, 어린아이가 도시의 벽 위에 그려놓은 낙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의 얼굴을 덮고 있는 하얗고 우뚝 솟은 뾰족한 복면에는 무심하게 꿰매놓은 재봉선 이외엔 아무런 묘사도 없다. 뚫려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복면 위에 그려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의 눈은 얼핏 보아서는 만화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인물처럼 앳되어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시선을 맞추려고 하면 이들과 눈을 맞출 수 없음에 당황하게 된다. 새까만 물감을 넉넉히 바른 붓으로 죽 그어놓았을 뿐이다. 이러한 세로의 붓질은 단호하기보다 공허하고 건조하다. 따라서 그들의 얼굴에서는 역동적인 생명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황량한 배경과 무심한 얼굴이 대비되는 이 작품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복면을 쓴 이들의 손이다. 복면 아래로 드러난 손은 분홍색으로 채워져 있다. 구체적인 묘사가 없어 진짜 손인지 복면처럼 장갑을 착용한 것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하얀 복면과 대비되는 짙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동시에 움직임이 감지되는 손가락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왼편에 앉은 이는 시가를 엄지와 검지로 잡고서 매캐한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있고, 오른편에 앉은 이는 곧게 뻗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시가를 끼운 채 유유히 운전을 하고 있다. 이들은 옅은 분홍색의 공간으로 향해 간다. 화면의 대부분을 희미한 하늘색이 뒤덮고 있지만, 보는 이의 시선도 두 존재가 향하고 있는 공간의 옅은 분홍색으로 옮겨간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공간은 탁한 흰색 위를 거친 붓 자국들이 분홍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더구나 캔버스 위에 일관된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투박하게 가해진 붓 자국들은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 희뿌연 세상을 떠올리게 만들어 입안을 컬컬하게 만든다. 일반적인 분홍색의 부드러운 달콤함은 찾을 수 없으며, 저들이 피우고 있는 시가처럼 거친 씁쓸함만이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왜 그들이 그런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치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한 채 걸어가는 듯 공허함이 맴돈다. 화가는 하나의 화면에서 두 존재의 손에 칠해진 짙은 분홍색과 공간에 사용된 옅은 분홍색으로 다른 의미를 나타낸다. 무기처럼 보이는 막대 옆에서 시가를 들고 있는 그들의 손은 기분 좋은 향긋함과는 거리가 멀다. 애써 손에 칠해진 빨간색을 지워냈지만 이미 깊게 스며들어 짙은 분홍색으로 물든 것처럼 보인다. 분홍색이 가득한 작품이지만 행복이라는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반적인 색채 언어와는 상당한 거리를 보인다.


같은 해 그려진 작품 〈City Limits〉에서 화가의 색채는 더욱 강렬해진다. 덕지덕지 바른 빨간색과 흰색 그리고 회색 물감들은 서로 뒤엉켜 기묘한 분홍빛의 세상을 만들어낸다. 마치 질척거리는 무언가를 잔뜩 흘려놓고 황급히 서두르며 닦아낸 모양새다. 그래서 붉은빛이 가득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끓어오르는 뜨거움보다는 이미 열기는 수습되어 식어버린 찬기만이 가득한 도시가 펼쳐져 있다. 그 위로 3인조의 복면 무리가 등장한다. 그들은 〈Town of edge〉처럼 순진하면서도 무심한 눈을 가진 채 서로 바짝 붙어 있다. 하얗던 복면은 엷은 분홍색으로 변해 있고 붉은 피가 튀어 흔적을 남긴 것처럼, 그들의 복면 위로 붉은 붓 자국들이 발견된다. 원색의 붉은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탁한 분홍색 흔적들은 이상하게도 피 비린내를 연상시킨다. 무언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듯 잿빛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태우며 군용 자동차처럼 크고, 엉성한 형태감으로 인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이동수단을 타고서 그들은 짙은 분홍색이 점령한 건물들 앞을 지나고 있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복면을 쓴 존재들이 KKK(Ku Klux Klan의 약자)단을 구성하는 클랜즈맨(Klansmen)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가장 특징적인 그들의 외모와 그들을 떠올리게 하는 서늘한 분위기를 연출하였기 때문이다. KKK단은 미국의 남북전쟁 후 세워진 인종차별주의적 극우 비밀조직이다. 이들은 하얀 가운에 흰 복면을 쓰고 십자가를 불태우는 등 흑인협박 의식을 통해 흑인과 흑인해방에 동조하는 백인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이후에는 흑인뿐 아니라 가톨릭계 이민자, 유대인, 동양인까지도 공격하였다. 이 화가가 유대인이며 KKK단이 폭력적인 테러를 저질렀던 그의 유년 시절에 주목한다면, 〈Town of Edge〉와 〈City limits〉라는 작품은 KKK단의 폭력성으로 황폐해진 도시 공간을 통해 역사적인 사건과 화가 개인의 상처를 다루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 〈The Studio〉에 나타난 클랜즈맨은 조금 다르다. 장갑을 낀 속에는 담배 한 개비를 태우고 있다. 이 장갑은 아주 옅은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새하얀 장갑 위로 손의 피부가 희미하게 비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장갑을 끼지 않은 다른 손이 선명한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화가의 작업실로 보이는 공간 또한 빠르게 휘저어 놓은 듯 분홍색이 발라져 있다. 그 공간 안에 놓인 흰색 캔버스, 흰색 전구, 흰색 시계, 흰색 장갑 그리고 새하얀 복면까지 어디 하나 분홍색으로 물들지 않은 것이 없다. 보는 이가 또다시 그의 기묘한 분홍색에 빠져들려고 할 때, 이 작품에서 클랜즈맨은 위의 작품들과 다른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된다. 어디론가 정처 없이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스스로를 그리는 그림 속 존재와 이 그림을 그렸을 거스턴의 모습이 자연스레 중첩된다. 액자 속 구성으로 연결된 이 관계는 클랜즈맨으로 표현된 존재가 사실 화가 자신이며, 이 작품은 자화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또한 이 작품은 거스턴의 분홍색이 어떤 색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분홍색의 사전적 정의는 하얀빛을 띤 엷은 붉은색이다. 즉 분홍은 빨간색과 흰색이 혼합된 붉은색으로 그 기원은 빨간색에 있다. 거스턴의 회화 속 분홍색은 일반적인 분홍색과 거리가 멀다. 이 작품들의 분홍색에서 행복이라는 부드러운 감정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색을 분홍색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타당할까. 사실 그가 화면 위에 칠하고 싶었던 색은 분홍색이 아니다. 〈The Studio〉에서 거스턴은 유년 시절의 그를 두렵게 만들었던 클랜즈맨과 자신과 등치 시킨다. 이로서 화가가 KKK단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기보다 화가 자신도 클랜즈맨이 될 수 있는, 악한 면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는 믿기 싫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스스로 악인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그는 자신 안의 핏빛 붉은색을 애써 하얀색으로 덕지덕지 덮었는지도 모른다. 〈The Studio〉에서 새빨간 손을 가린 장갑처럼 말이다. 하지만 애써 감춘 손으로는 담배만 태울뿐, 자신을 직시하며 나타내는 것은 벗겨진 붉은색 손이다. 화가의 그림엔 비린내 나는 붉은빛이 감돌지만, 두려웠던 화가 스스로 그것을 닦아내는 과정에서 거스턴의 분홍색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 생겨나는 방향성 없는 분방한 붓으로 화면에 가해진 붓질에서 불안감이 드러난다.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상징하는 분홍색은 화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와는 융화되기 어렵다. 피로 물든 손을 하얀 비누로 닦다 보면, 비누에는 탁한 분홍빛의 거품이 남는다. 잔혹함은 흐려졌지만 또 다른 불쾌한 흔적이다. 마치 이 모습처럼 화가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화면 위에 그려 놓았는데 그 고민의 흔적들이 독특한 색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랑스러운 분홍색은 그의 작품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절대적인 선을 상징해 줄 선명한 흰색도 붉은빛으로 이미 가득한 그의 작품엔 나타날 수 없다. 거스턴의 분홍색은 악을 자행하는 자들에 대한 공포,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의 색이다. 그렇기에 화가가 살아왔던 세상은 마치 그의 그림이 주는 느낌처럼 달콤하기보다는 씁쓸했고, 부드럽기보다는 거칠었으며, 향긋하기보다는 비릿했다. 사탕보다는 담배, 아이의 손보다는 악인의 손, 꽃보다는 피와 쉽게 어우러지는 이 화가의 분홍색은 보는 이 스스로도 자신의 내면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진짜 당신의 세상에 피어 있는 분홍색은 달콤한 색인가요, 사실 붉은색을 애써 닦아놓은 분홍색은 아닌가요.”라고 말이다. 화가 필립 거스턴에게 핑크빛 세상이란 마주하기 어렵기에 흐린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래서 뿌옇게 보이는 붉은 세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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