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나는 이야기

전시 <다시 피어나는 이야기 숲>

by 말하는 돌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한 세상을 상상해 본다. 지극히 사적이고 사소한 욕망일지라도, 그 안에는 저마다 꿈꾸는 아름다움의 조각들이 자리한다. 그러나 각자의 꿈은 서로를 침범하고, 충돌하며,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세계, ‘유토피아’란 본디 완성될 수 없는 미완의 상상이다. 특히 ‘영생’이라는 보편적 염원조차 현실에선 언제나 좌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주어진 현실에 맞추어 반쪽짜리 행복을 좇을 것인지, 아니면 비록 찰나일지언정 자신만의 온전한 기쁨을 만들어갈 것인지.


우리는 소설, 그림, 영화 속에서 그 ‘이상’을 간접적으로 만난다. 그 세계는 종종 환상적이고, 매혹적이며, 현실과는 다른 온기를 품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잠시 그 안에 머문다. 예술은 불충분한 현실을 사는 이들에게 위안의 공간을 마련해 주고, 때로는 그 이상에 다가설 용기를 조심스레 건넨다. 그러나 그 꿈은 문득 현실 감각을 흐리게 만들거나, 경계가 희미해진 감각 속에서 ‘어딘가 이상한’ 낯섦을 남기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십장생도>는 그 꿈의 정점에 있다. 불로장생의 이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이 그림은 자연물 숭배와 신선 사상이 어우러진 조선의 유토피아다. 해, 구름, 산, 물, 학, 사슴, 거북, 소나무 같은 장생물들이 병풍 위를 환상적으로 수놓는다. 원근도 사실성도 중요치 않다. 왜곡된 비례와 과장은 오히려 그 세계가 완결된 세계임을 증명한다. 그곳은 현실이 아닌, 오래도록 살아가고 싶은 삶의 공간이었다.


지난가을, 인사동의 갤러리에서 열린 《다시 피어나는 이야기 숲》전에서는 현대의 십장생도라 할 만한 그림들이 소개되었다. 채혜선 작가의 〈Friends〉 시리즈는 맑고 투명한 색채 속에서 ‘동물 친구들’이 아늑한 자연을 유영하며 살아간다. 병풍 대신 액자에 담긴 이 현대의 이상 세계는 귀여움과 천진함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전통 민화의 맥을 잇되, 감각적으로 현대화된 화면은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틈은 어느 순간 불쑥 드러난다.


시선을 붙잡은 것은 연못을 배경으로 한 풍경이었다.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골프 카트, 연못가에 들어선 사람, 그리고 그 옆에서 연꽃 사이를 노니는 룽키(작가의 반려견)와 오리들. 해맑고 유쾌한 장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에 거슬림이 남았다. 골프공을 물고 있는 오리의 모습은 어딘지 위태로웠고, 유희의 장난감보다는 위협적인 이물질처럼 보였다. 문득, 죽은 새들의 뱃속에서 발견되는 플라스틱 조각들이 떠올랐다. ‘정말 골프공이 오리에게 장난감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그 세계를 서서히 깨뜨리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옮기자, 또 다른 꿈이 펼쳐졌다. 커다란 선인장에 피어난 꽃들, 노을빛 아래 걷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동물들. 화면의 중심엔 골프공을 손에 든 캥거루, 밤을 모으는 청설모, 그 곁의 형광색 골프공이 있었다. 유독 두껍게 칠해진 그 공은 화면의 색감과 이질적으로 튀어나오며 강한 무게감을 형성했다. 음식 곁에 놓인 이 조그만 인공물은 생명과 죽음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익숙하게 배치된 아름다움 속에, 이질적인 물성이 껴들며 유토피아는 다시금 뒤틀린다.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 다음 작품은 정적과 적막 속에서 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고요한 숲을 걷는 듯한 화면, 그리고 그 안을 유유히 지나가는 공작새들. 그들이 품은 알 옆에는 또 하나의 골프공이 놓여 있었다. 알은 생명의 시작이자 연약한 미래다. 반면, 골프공은 딱딱한 물질이며 스포츠의 도구다. 생명과 놀이, 자연과 인공이 나란히 놓인 그 장면은 이상 세계의 완성보다는 틈과 깨짐, 배신을 말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림 속 아름다움은 더 이상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공작을 지켜보는 룽키와 새들, 그리고 화면 저편에서 골프에 심취한 인간은 전혀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처럼 보인다.


이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곳은 온전히 아름답기만 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채혜선 작가의 유토피아는 조선의 십장생도처럼 완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불협화음, 작은 불균형, 미묘한 부조화 속에서 그 진실을 드러낸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녀의 그림 속 골프공은 <인셉션>의 팽이처럼 꿈에서 현실로 돌아가는 장치다. 이 아름다운 이상 세계는, 결국 현실의 부재를 자각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현대사회는 점점 더 단순해지고 해석의 여지를 줄이며, 때론 그 세계가 허구라는 사실조차 감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채혜선의 그림은 되려 퇴보하는 감각을 일깨운다. 유토피아란 결국 충돌과 균열, 그리고 틈을 마주할 때 진짜로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시를 끝내고 고개를 돌렸을 때,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보인 인사동 거리. 은행나무, 비둘기,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그 풍경마저도 하나의 전시처럼 다가왔다. 이제 더 이상 그림이 아닌 현실에서, 나는 또 다른 각성의 순간을 맞이했다. 꿈에서 깨어난 자의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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