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경험으로서 예술
예술은 감상자에게 능동적인 ‘직접 경험’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는 명제를 옹호한다. 간접경험이 아닌, 몸과 감각, 사고가 함께 작동하는 직접경험의 순간을 마련함으로써, 감상자는 예술의 지각 방식, 자극의 강도, 경험의 층위 등 복합적인 감상의 차이를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인식은 결국,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의 가능성으로 확장된다.
직접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예술적 감상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된다. 예술이 일상적인 행위를 수행하더라도, 그것이 펼쳐지는 장소가 예술의 장이라면, 감상자는 그 비일상적 맥락 속에서 스스로에게 순수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행위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 그러한 자각은 곧 예술이 만들어내는 고유하고 질적인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지며, 그 순간은 삶의 여타 경험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강렬한 감각으로 각인된다.
오늘날 예술은 수행성(performativity)의 개념을 받아들이며 미학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퍼포먼스 아트가 있다. 퍼포먼스는 예술가와 감상자의 역할을 뒤바꾸고, 감상자를 예술의 공동 생산자로 끌어들이며, ‘경험의 장소’를 만들어낸다. 이때 예술가는 더 이상 절대적 창조자나 권위자로 군림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일부 권한을 관객과 나누고, 오히려 그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작품을 완성해간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퍼포먼스는 공동체적인 예술로 확장되며, 예술가는 기획자가 아닌 촉발자가 된다.
예술과 감상자의 신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현장성’은 이 경험의 직접성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조건이다. 그것은 단지 라이브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감상자의 존재와 감정, 판단, 사고가 예술의 구성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기술 매체의 중개 없이 오로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을 통해 예술을 성립시키고자 하며, 그 안에는 매체화된 세계에 대한 명백한 저항의 몸짓이 깃들어 있다. 이들은 예술의 본질을 묻고, 감상의 주체성을 되돌리며, 문화산업의 기계적 반복 속에서 새로운 감각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예술이 감상자 개개인에게 남긴 경험의 흔적이다. 하나의 예술이 한 사람의 내면에 질문을 남기고, 그 질문을 스스로 사고하게 만들었다면, 그 자체로 예술은 완성된다. 결국, ‘하나의 경험’은 단지 예술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경험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 퍼포먼스 예술이 지닌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예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일 것이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 1946– )는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퍼포먼스로 잘 알려진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행위예술가다. 2010년, 그녀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미술사상 가장 대규모의 회고전을 열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과거의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기록하거나, 새로운 형태로 재연한 것들이었고, 그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주목을 받은 작품은 ⟪The Artist is Present⟫(2010)이었다.
이 퍼포먼스에서 아브라모비치는 늘어진 드레스를 입고, 전시장 한가운데 작은 목재 테이블 너머에 앉아 있었다. 무표정하고도 단호한 얼굴로, 그녀는 침묵 속에서 단 한 가지 행위만을 수행했다. 마주 앉은 관람자와 오로지 눈을 맞추는 것. 누구든 원한다면 그녀 앞에 앉을 수 있었고,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들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침묵의 응시를 나누게 된다.
외견상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퍼포먼스는, 전시 기간 내내 끊임없는 대기 줄을 만들어냈다. 그 줄의 끝에는, 예술가를 보기 위해 온 이들, 호기심 어린 관람자들, 무언가를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대면의 순간, 누군가는 예술가의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며 금세 자리를 떴고, 누군가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동에 휩싸여 눈물을 흘렸다. 또 누군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히 자리를 지켰다. 이 퍼포먼스는 어떤 객관적 의미로 고정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감상자 각자의 내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짧지만 강렬한 응시의 행위는, 일상적이면서도 극도로 낯설다. 눈을 맞춘다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그것이 낯선 공간, 낯선 관계 속에서 반복되는 순간, 감상자는 감정적으로 변화하며 예술 속에 ‘살아 있는 존재’로 개입하게 된다. 이 거리감과 정적 속의 긴장, 그것이야말로 존 듀이가 말한 ‘행함과 겪음’의 공간이다. 감상자는 이 안에서 단순한 관조자가 아니라, 하나의 ‘경험’을 살아내는 주체가 된다.
⟪The Artist is Present⟫는 그 자체로 총체적 예술 경험의 장이 된다. 만약 아브라모비치가 자신의 눈빛을 영상으로 촬영해 매체로 전달했다면, 이처럼 다양한 반응과 내면의 진동은 가능했을까? 그녀의 눈빛이 감상자에게 도달하는 경로가 미디어를 통했다면, 그렇게 정제되고 간접적인 경유를 통해서 이토록 섬세한 감정의 교류가 가능했을까? 현장에서 마주한 그 눈빛만이 갖는 직접성, 그 비가시적 울림은 바로 퍼포먼스가 예술로서 발화하는 핵심이었다.
이와 같은 예술은 감상자에게 단순히 예술을 ‘보는 자’가 아닌, 그 일부가 되는 ‘참여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한다. 이는 참여예술이라 불리는 영역으로,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중요한 흐름으로 부상하였다. 참여예술은 예술가의 일방적 창작을 넘어 감상자와의 공동 작업, 경험의 공유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실천이다.
예술가는 그 장을 열고, 감상자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구성해간다. 단순한 감상은 이제 해석과 참여의 행위로 진화한다. 그들은 예술가가 만들어낸 맥락 안에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하나의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예술 안에서 공명할 때, 예술은 더 이상 ‘작품’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경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