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고요한 회귀

하이데거와 극사실 회화

by 말하는 돌

극사실 회화는 ‘얼마나 똑같이 그릴 수 있는가’의 기교를 겨루는 장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실성이 우리 안에서 어떤 울림을 일으키는가, 그리고 그 울림이 세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다시 세우는가에 관한 물음 위에 서 있다. 화면 속 사물이 극도로 선명하게 현존하는 순간, 감상자는 자신의 눈과 세계 사이에 내려앉은 오래된 습관을 의심하게 된다. 1970년대 중엽 이후 한국 화단에 등장한 극사실 회화를 이해하려면, 단순한 재현의 문제를 넘어, 실재와 환영의 경계, 그리고 왜 그 시기에 ‘다시 사실적으로 그리는 회화’가 필요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극사실 회화의 본질은 실재를 기계처럼 복제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실재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새로운 형상’을 창출하는 일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예술을 ‘진리의 장(場)을 여는 사건’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진리란 단순한 명제가 아니라,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비은폐(알레테이아)다. 예술은 세계와 사물이 서로를 드러내는 자리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존재를 새롭게 경험한다.


하이데거가 반 고흐의 <한 켤레의 구두>를 예로 들었을 때, 그가 본 것은 단순한 신발의 윤곽이 아니었다. 흙냄새가 배어 있는 무게, 밭고랑 사이를 걷는 느린 발걸음, 저녁의 고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한 인간의 삶 전체였다. 사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문이었다. 그렇다면 극사실 회화 역시 단순한 재현을 넘어, 감상자 앞에 세계를 열어 놓는 행위일 수 있다.


고영훈의 <이것은 돌입니다> 연작은 그 문을 여는 그림이다. 1960년대 추상이 지배하던 한국 미술에서, 그는 홀로 자연석 앞에 앉았다. 강과 산에서 주워온 돌을 깨끗이 씻어 올려놓고, 표면의 결, 균열, 색조를 숨김없이 옮겼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모사가 아니라, 돌이 하나의 세계가 되도록 하는 작업이었다. 그에게 돌은 무겁고 차가운 덩어리이면서 동시에 시간을 품은 존재였고, 그 앞에 선 화가는 그 세계의 문지기였다.


제목 <이것은 돌입니다>는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 선명히 대조된다. 마그리트가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을 드러냈다면, 고영훈은 회화 또한 실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서사를 걷어내어 감상자가 돌 앞에 멈춰 서도록 한다. 그 침묵 속에서 감상자는 자기 시선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 깨닫게 된다.


그의 돌은 부유하듯 떠 있고, 기울어질 듯 불안하게 서 있으며, 때로는 표면이 과도하게 확대되어 사진조차 능가하는 밀도를 뿜어낸다. 가까이 다가서면 손끝이 그 차가움을 느낄 것처럼, 미세한 균열과 세월에 닳은 홈이 숨을 쉬고 있다. 붓질은 감춰져 있으나, 층층이 쌓인 색과 질감이 만들어낸 고요한 중량감이 화면을 지탱한다. 이때 관람자가 마주하는 것은 ‘돌의 그림’이 아니라, 눈앞에서 존재하는 ‘돌’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대인은 ‘존재 망각’ 속에 산다. 사물을 기능과 소비의 틀 안에서만 보고, 그것이 여는 세계를 잃어버린다. 존재의 울림을 듣는 감각은 무뎌지고, 삶은 비본래적 실존에 머문다. 그러나 예술은 그 망각을 깨뜨린다. 고영훈의 돌은 도구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서의 사물이며, 감상자는 그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자신과 세계의 거리를 새롭게 재본다.


1975년의 <이것은 돌입니다 7593>은 연작의 출발점인 <…7411>과 닮았지만, 표면의 마티에르가 한층 깊다. 세월이 깎아 만든 결과 흠이 촘촘히 박혀, 돌의 ‘자기-안에-서-있음’이 강하게 드러난다. 존재는 스스로를 지탱하며 서 있을 때, 가장 강렬하게 ‘있음’을 발산한다.


<…7545>와 <…7558>에서는 세로로 긴 화면 속, 쓰러질 듯 기울어 선 돌이 등장한다. 균형과 불안이 공존하는 이 형상은,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향한 존재’—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존재—를 은유한다.


1978년의 <…7888>은 변화 없는 배경 위에 부드러운 돌 하나를 올려, 사진처럼 차가운 정물을 만든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표면의 미묘한 색 변화와 결이 숨을 쉬고 있다. 그 돌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사물의 현전이다.


각 변주는 단순한 조형 실험이 아니라, 존재의 다양한 양태—안정과 불안, 침묵과 긴장, 물질성과 세계성—를 드러낸다. 고영훈의 돌은 ‘존재의 장’을 열고, 그 안에서 감상자가 자신과 시간을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오늘, 이미지는 현실을 대체하고, 화면 속 세계가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고영훈의 돌은 그 환영 속에서 잊힌 실재를 불러낸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진리가 열리는 자리이며, 존재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다.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단순히 본다기보다, 존재의 무게와 시간의 흐름,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체험한다. 그 돌은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 잃어버린 고향(Heimat)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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