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이전의 풍경

김수자의 작품 읽기

by 말하는 돌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조용한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산은 말하지 않았고, 물은 출렁이지 않았으며, 불은 맹렬하지 않았고, 바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풍경이라 부르고 싶었다. 혹은, 침묵이라고. 그것은 단순히 고요한 장면이 아니라, 내가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시간의 결이었다.


〈지수화풍〉은 그렇게 다가왔다. 얼굴도, 설명도, 목소리도 없이. 마치 스스로의 이름을 지우고 떠도는 존재처럼. 화면은 나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를. 화면은 멈춰 있었지만, 내 마음은 그 안에서 길을 잃었고, 아니, 기꺼이 길을 벗어났다.


제목은 동아시아 사유의 네 원소—지(地), 수(水), 화(火), 풍(風)—를 불러온다. 그것들은 단순한 자연의 조각이 아니라, 탄생과 소멸, 생과 사를 끝없이 순환시키는 힘이다. 김수자는 이를 회화적 재현으로 옮기지 않는다. 대신 천, 바느질, 설치, 퍼포먼스라는 그녀만의 언어로 원소들이 서로 스며드는 ‘흐름’을 시각화한다.


땅과 물, 불과 바람. 우리는 그것들을 매일 보고, 듣고, 느끼면서도 그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너무 익숙해, 그 앞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조차 잊어버린 것들이다. 그러나 김수자의 카메라는 그 익숙함을 애써 포착하지 않는다. 도리어 낯설게 만든다. 아주 느리고, 아주 고요하게. 마치, 이름조차 허락받지 못한 존재처럼. 거기에는 김수자도 없다. 오직 ‘존재하는 것들’만이 남는다.


〈지수화풍〉의 표면은 고정된 작품이지만, 시각과 사유 속에서는 끊임없이 이동한다. ‘지’의 무게와 ‘풍’의 가벼움, ‘수’의 유동과 ‘화’의 확산이 서로를 침투하며 경계를 거부한다. 이 상호 스며듦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노마디즘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노마드적 존재는 고정된 중심이나 목적지를 전제하지 않는다. 그는 경계 위를 가로지르며 머물지 않는다. 그 움직임은 점에서 점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되는 장(場) 속의 유동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감상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사유하는 유목민이 되어 있었다. 익숙한 자아를 잠시 내려두고, 땅 위를 걷기도 하고, 불빛 위를 떠돌기도 하고, 바람처럼 무형의 존재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존재였다. 중심 없이도, 머무름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짐을 싸던 김수자는 이제 감상자에게 짐을 풀 수 있는 여백을 남긴다. 그녀는 스스로의 무게를 거두고, 침묵과 공기의 무게를 내게 맡긴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읽지 않는다. 대신 내 이야기를, 내 기억을, 내 상처와 그 조용한 생존의 흔적들을 꺼내어 놓는다. 작품은 나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지만, 나 또한 주인공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나를 나로부터 이탈시켜 타자가 되게 한다.


〈지수화풍〉은 자연을 찍은 영상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틈을 열어, 나를 낯선 길 위에 세운다. 그 길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는다. 땅의 무게와 불의 열기, 물의 흐름과 바람의 숨결이 스쳐가는 그 경계에서 나는 알게 된다. 사라짐이 파괴가 아니라, 변주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남는 것은 기이할 만큼 평화로운 감정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상태. 언어 이전의 상태. 내가 사라지고, 오직 땅과 불과 물과 바람만 남는 어떤 시간. 김수자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들었다. 그녀의 침묵이 내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 지냈던 가장 오래된 언어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언어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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