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 놓지 않고, 몸은 자유롭게

<산책> (1918)

by 말하는 돌

1917년의 10월 혁명은 마르크 샤갈에게 위험한 시기였지만, 동시에 삶의 방향을 재정렬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는 울타리에 붙은 볼셰비키의 명령문들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공장들은 멈췄다. 지평선이 열렸다. 공간과 공허. 빵은 더 이상 없었다.” 혁명은 제정 러시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고, 샤갈은 그것을 “내가 내 그림을 뒤집듯, 세계가 통째로 전도된 사건”으로 인식했다.


그 무렵 샤갈은 혁명의 문화적 상징으로 호명되며 중요한 공적 직책을 제안받았으나, 정치의 중심보다는 예술이 살아 숨 쉬는 현장을 택해 비테프스크 예술 인민위원직을 수락한다. 이 선택으로 그는 비테프스크 미술학교를 설립하고, 엘 리시츠키와 카지미르 말레비치 등 당대의 핵심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게 된다. 잠시나마 비테프스크는 유대 민속 전통과 급진적 모더니즘이 교차하는 독특한 예술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절대주의를 둘러싼 미학적·이념적 갈등 속에서, 샤갈의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회화는 ‘부르주아적 개인주의’로 비판받았다. 결국 그는 인민위원직을 사임하고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국립 유대인 실내극장의 무대미술을 맡아, 회화·음악·연극·민속이 결합된 대형 벽화 작업을 수행한다. 한 비평가가 이를 “회화로 된 히브리 재즈”라고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시기의 샤갈은 회화를 단일한 매체가 아니라, 삶 전체를 수용하는 장치로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어도 내전과 기근은 계속되었다. 샤갈 가족은 생활비가 덜 드는 교외로 이주했고, 그는 매일 혼잡한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통근해야 했다. 말라호프카의 유대인 소년 보호소에서 고아들을 가르치며, 이디시어 시집 『슬픔』의 삽화를 제작하던 시기 역시 이 무렵이다. 세계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삶은 좀처럼 가벼워질 기미가 없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이 〈산책〉이다.


샤갈의 회화에서 사랑은 결국 몸의 문제로 드러난다. 얼굴이 세계가 되었고, 결혼이 장면이 되었다면, 그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사랑은 몸을 어디에 두는가. 〈산책〉에서 샤갈은 이 질문에 가장 명확하면서도 가장 시적인 방식으로 답한다. 사랑한 몸은 더 이상 땅에만 속하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그의 연인 벨라 로젠펠트는 공중에 있다. 그녀의 몸은 가볍게 들어 올려져 있고, 한 손은 샤갈과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은 단단하지 않다. 끌어당기거나 붙잡는 힘이 아니라, 놓아주면서도 이어지는 긴장이다. 샤갈은 땅 위에 서 있고, 벨라는 하늘로 기울어진다. 두 사람은 같은 높이에 있지 않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관계는 유지된다. 사랑은 동일한 위치를 요구하지 않고, 다른 위치를 허용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1917–18년은 샤갈에게 역사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가장 불안정한 시기였다. 혁명 이후의 혼란, 공공 미술과 행정 업무, 그리고 결혼과 가정의 형성. 세계는 급변했고, 안정은 약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산책〉의 화면에는 비극적 긴장이 없다.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도 사랑은 몸을 떠오르게 하는 조건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버팀의 방식이다.


이 그림에서 중력은 제거되지 않는다. 샤갈의 몸은 여전히 땅에 닿아 있고, 마을의 집들과 나무, 언덕은 견고하게 자리한다. 그러나 그 질서 위에서 벨라의 몸은 규칙을 벗어난다. 이는 사랑이 현실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다른 물리법칙으로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중력을 없애지 않고, 중력을 상대화한다.


벨라의 부유는 환상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샤갈이 경험한 사랑의 실제 감각에 가깝다.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거나 고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가 가장 멀리 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벨라는 날고, 샤갈은 놓지 않는다. 손은 연결되어 있으되, 몸은 자유롭다.


〈산책〉의 색채는 밝고 투명하다. 이 당시 작품들에서 색이 긴장과 충돌을 품고 있었다면, 여기서 색은 호흡처럼 화면을 감싼다. 하늘은 위협적이지 않고, 땅은 무겁지 않다. 색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이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사랑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일상이 가능한 상태로 나타난다. ‘산책’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 장면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순간이다.


이 반복 가능성은 중요하다. 사랑이 비극이나 환희의 정점으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샤갈의 사랑은 다르다. 그것은 일상 속에서 세계의 규칙을 조금씩 어긋나게 만드는 힘이다. 산책이라는 평범한 행위 속에서, 한 사람의 몸은 하늘에 닿는다. 샤갈은 극적인 서사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현실을 살짝 들어 올린다.


이 그림에서 두 사람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그들은 걷고 있다. 걷는다는 것은 멈추지 않되, 서두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은 방향이 아니라 속도다. 샤갈에게 사랑은 도착이 아니라, 함께 이동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장면에는 긴박함이 없다. 공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보이지 않는다.


〈산책〉은 결혼 이후의 사랑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도를 통과한 뒤에도 남아 있는 사랑의 운동성을 보여준다. 사랑은 정착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착 이후에도 계속 움직여야 하는 관계다. 이 움직임 속에서 몸은 때로 땅을 벗어나고, 때로 다시 돌아온다. 중요한 것은, 그 이동이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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