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풍경이 될 때

<바이올린 연주자> (1938)

by 말하는 돌

1923년 마르크 샤갈은 모스크바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귀환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베를린에 들러 전쟁 이전 전시를 위해 맡겨 두었던 수많은 초기 작품들을 되찾으려 했지만, 단 한 점도 회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 도착한 뒤, 샤갈은 다시 한 번 “그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했던 자유로운 확장과 충만함을 재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모든 초기 회화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는 새로운 출발을 택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돌아갔다. 비테프스크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풍경과 감각은 그의 회화 속에서 다시 형태를 얻기 시작했다.


이 시기 샤갈은 프랑스의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와 협력하며 판화 작업에 집중했다. 니콜라이 고골의 『죽은 혼』, 『성서』, 장 드 라 퐁텐의 『우화』를 위한 삽화 연작은 이후 그의 판화 작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취로 평가된다. 동시에 그는 프랑스 전역과 코트다쥐르를 여행하며 풍경을 스케치했고, 네덜란드·스페인·이탈리아·이집트·팔레스타인까지 이어진 이동 속에서 빛과 색, 기억의 결을 새롭게 축적했다. 그는 남부에서 “조국에서는 결코 본 적 없던 풍부한 초록빛”을 보았고, 네덜란드에서는 황혼의 진동하는 빛을, 이탈리아에서는 햇빛 속에서 평온해진 박물관의 시간을, 팔레스타인에서는 성서와 자기 존재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이동과 축적은 1930년대 후반의 회화에서 하나의 형식으로 응결된다. 〈바이올린 연주자〉(1938)는 그 결정체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물의 비례 붕괴다. 연주자의 몸은 집과 마을 위에 걸쳐 앉아 있으며, 신체는 풍경보다 크다. 그러나 이 과장은 위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거대한 몸은 공간을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공간과 겹쳐진다. 샤갈은 인물을 배경 위에 ‘올려놓지’ 않고, 배경 속으로 ‘겹쳐 넣는다’. 그 결과 인물과 마을은 전경과 후경으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평면 안에서 공존하는 요소가 된다. 몸은 풍경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된다.


연주자의 자세는 안정적이지 않다. 몸은 비스듬히 기울어 있고, 다리는 공중에 걸쳐 있다. 그러나 이 기울어짐은 추락의 전조가 아니다. 중력은 분명 작동하지만, 그 방향은 단일하지 않다. 몸의 무게는 집의 지붕과 마을의 경사면으로 분산된다. 이 분산은 불안이라기보다 정착된 불균형에 가깝다. 샤갈은 균형을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균형이 유지되는 방식을 새로 배열한다.


바이올린과 활의 배치는 이 장면의 핵심 축을 이룬다. 활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사선으로 놓이며, 인물의 기울어진 몸과 시각적 리듬을 공유한다. 음악의 선율은 들리지 않지만, 몸의 방향과 화면의 선들이 이미 연주를 대신한다. 이 회화에서 음악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자세와 배치로 번역된 리듬이다. 샤갈의 작품에서 음악은 종종 소리보다 먼저 몸으로 나타난다.


색채 역시 절제되어 있다. 푸른색과 갈색, 황토색이 화면을 지배하며 강렬한 대비는 피한다. 이는 축제의 고양감보다는 지속되는 상태를 암시한다. 인물의 의상은 배경과 분리되지 않고 스며들듯 놓여 있으며, 색은 연주자를 돋보이게 하기보다 그가 풍경과 같은 호흡을 갖도록 만든다. 연주자는 무대 위의 주인공이 아니라, 마을의 일부로 존재한다.


집과 마을의 묘사는 단순화되어 있다. 세부는 생략되고 형태는 기호에 가깝다. 그러나 이 단순화는 결핍이 아니다. 반복되는 집의 형태는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은 연주자의 음악과 시각적으로 호응한다. 집들은 배경이 아니라, 연주의 반주처럼 배치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연주자의 시선이다. 그는 관객을 응시하지 않는다. 시선은 비껴가 있으며, 집중은 손과 악기에 머문다. 이는 이 연주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연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수행되는 행위임을 드러낸다. 이 그림에서 음악은 메시지도, 상징도 아니다. 그것은 지속의 방식이다.


1938년이라는 제작 시기는 이 형식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유럽 전반에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였지만, 샤갈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몸을 크게 만들고, 공간을 겹치며, 음악을 자세로 번역함으로써 세계가 버티는 감각을 형식 속에 남긴다. 이 연주자는 희망의 알레고리도, 비극의 예언도 아니다. 그는 그저 연주하고 있으며, 그 연주가 마을과 함께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전 09화사랑을 다시 부르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