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물러나고, 이야기는 남는다

<아브라함과 아이작의 희생>

by 말하는 돌

1930년경 마르크 샤갈은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며 풍경과 다채로운 식생, 푸른 지중해, 온화한 기후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스케치북을 들고 시골로 떠나는 여행을 여러 차례 반복했고, 인접 국가들 역시 부지런히 오갔다. 더불어 그는 네덜란드에서 늦은 오후와 황혼 사이에 머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미묘하게 진동하는 빛을 발견했고, 이탈리아에서는 햇빛에 의해 생명을 얻은 박물관의 평온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스페인에서는 때로는 잔혹하기도 한 신비로운 과거와, 그 하늘과 사람들의 노래가 주는 영감을 경험했다. 그리고 동방, 곧 팔레스타인에서는 뜻밖에도 성서와 더불어 자기 존재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회고한다. 이 여행들은 샤갈에게 단순한 시각적 자극이 아니라, 세계를 감각하고 기억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계기였다.


파리로 돌아온 뒤, 암브루아즈 볼라르는 샤갈에게 구약성서를 삽화로 제작해 달라고 의뢰했다. 그는 프랑스에 머물며 이 작업을 수행할 수도 있었지만, 이 제안을 계기로 성서를 직접 체험해야 할 장소, 다시 말해 이야기가 태어난 땅으로 향하기로 결정한다. 1931년, 샤갈은 메이어 디젠고프의 초청으로 가족과 함께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을 방문한다. 샤갈은 성지에서 약 두 달을 머문다. 이디시어와 러시아어가 자연스럽게 오가는 이곳에서 그는 오랜 망명 끝에 처음으로 ‘집에 돌아온 듯한 감각’을 경험한다.


이후 샤갈은 유대인의 역사와 시련, 예언과 재앙의 서사 속으로 깊이 침잠한다. 이미 근대 미술의 중심에서 명성을 얻은 화가가, 다시 아주 오래된 이야기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성서 작업에 거의 강박적으로 몰두한다. 암스테르담에서 렘브란트와 엘 그레코의 성서 회화를 연구하고, 유대인 지구를 거닐며 과거의 감각을 몸으로 되살린다.


샤갈에게 성서는 우주 창조의 신화라기보다 인간의 이야기였다. 그의 천사들은 초월적 존재라기보다 인간의 몸짓과 리듬에 가깝고, 신성은 계시의 번개가 아니라 서사의 온기로 남는다. 이러한 태도는 〈아브라함과 아이작의 희생〉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장면은 성서에서 가장 잔혹한 시험 중 하나다. 전통적 종교화는 이를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믿음의 승리로 그려 왔다. 그러나 샤갈은 이 장면을 결단의 순간이 아니라 멈춤의 순간으로 포착한다.


화면 속 아브라함은 단호하지 않다. 그의 몸은 기울어 있고, 표정에는 확신보다 망설임이 깃들어 있다. 칼을 쥔 손은 힘차지 않으며, 아이작의 몸 또한 완전한 희생의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핵심은 행위가 아니라 주저함이다. 샤갈은 신의 명령보다, 그 명령 앞에 선 인간의 흔들림을 그린다.


천사의 개입 역시 극적인 구원의 제스처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가 파국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간신히 균형을 붙잡는 장치에 가깝다. 여기서 신성은 절대적 권위로 군림하지 않는다. 신은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윤리가 완전히 붕괴되지 않도록 개입하는 목소리로 축소된다. 이것이 샤갈의 성서 해석이다.


색채 또한 이 해석을 강화한다. 붉음은 피의 예고처럼 과장되지 않고, 빛은 계시처럼 폭발하지 않는다. 색은 화면 전체에 고르게 퍼지며, 장면을 하나의 기억된 이야기처럼 감싼다. 이는 지금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수없이 반복되어 온 서사의 한 장면임을 암시한다. 신성은 찰나의 번뜩임이 아니라, 반복 속에 남는 감각이 된다.


아브라함과 아이작의 이야기는 여기서 단순한 믿음의 시험이 아니다. 그것은 세대 간의 단절, 권위와 복종, 명령과 윤리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질문이 된다. 샤갈은 묻는다. 신의 이름으로 내려진 명령 앞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복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복종은 언제 윤리를 넘어 폭력이 되는가.


그래서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희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칼은 내려오지 않고, 피는 흐르지 않는다. 샤갈은 성서의 결말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 결말의 의미를 다시 배열한다. 구원은 신의 전능함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가 파국으로 완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샤갈에게 성서 연작은 종교화의 복원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사라진 시대에도 인간이 끝내 버리지 못한 이야기의 윤리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신성은 더 이상 초월적 권위로 작동하지 않지만, 이야기는 남아 인간의 선택을 시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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