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그림에서 함께 존재하는 그림으로

<파리 오페라 극장 천장화> (1963)

by 말하는 돌

1963년, 마르크 샤갈은 19세기 프랑스의 위엄과 미학을 상징하는 국립 기념물, 파리 오페라 극장의 새로운 천장화를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이 결정의 배후에는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있었다. 말로는 오페라 극장의 천장을 과거의 양식을 반복하는 장식으로 남겨두는 대신, 살아 있는 현재의 예술로 갱신하고자 했고, 그 임무를 샤갈에게 맡겼다.


그러나 이 선택은 곧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 화가가 프랑스의 국립 기념물을 장식한다는 사실, 더 나아가 신고전주의 건축의 상징 위에 현대적 색채가 덧입혀진다는 점은 ‘전통 훼손’이라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샤갈은 이미 프랑스 시민이었고 대가도 받지 않는 작업이었지만, 논쟁은 그의 예술보다 출신과 정체성을 집요하게 문제 삼았다. 이는 곧 질문으로 수렴된다. 누가 국가의 얼굴을 그릴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국가는 어떤 예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당시 일흔일곱 살이었던 샤갈은 약 1년에 걸쳐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한다. 약 220㎡에 달하는 캔버스는 다섯 개의 분절로 제작되어 폴리에스터 패널에 부착된 뒤, 높이 약 21미터의 천장으로 끌어올려졌다. 중요한 점은 샤갈이 기존의 천장을 지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원래의 고전적 천장을 보존한 채, 그 위에 새로운 회화를 ‘겹쳐’ 올렸다. 이는 파괴가 아니라 공존의 전략이었고, 차이를 지우지 않고 함께 두려는 그의 예술 윤리가 건축적 차원으로 확장된 선택이었다.


천장화는 하나의 중심 서사를 거부한다. 화면은 다섯 개의 색채 영역으로 나뉘며, 모차르트, 바그너, 무소르크스키, 베를리오즈, 라벨 등 오페라와 발레의 거장들이 암시적으로 등장하지만, 누구도 영웅적 초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음악가와 무용수, 연인과 도시의 풍경, 악기와 몸짓이 부유하듯 섞이며, 관객의 시선은 특정 지점에 붙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색채는 상징의 언어가 아니라 리듬으로 작동한다. 파랑은 슬픔을, 빨강은 열정을 의미하도록 고정되지 않는다. 색은 음악처럼 흐르며, 중앙의 크리스털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빛과 관객의 움직임, 공연이 지속되는 시간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이 천장화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머무는 환경이다. 관객은 좌석에 앉아 고개를 들거나, 공연 전후에 무심코 올려다보며 그림의 일부가 된다. 1964년 9월 23일 공개식에서, 샹들리에가 꺼진 상태로 시작된 공연의 마지막 순간, 불이 켜지며 색채가 한꺼번에 드러났을 때 가장 좋은 자리는 무대 앞이 아니라 가장 높은 발코니였다는 일화는 이 작업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회화는 공연의 배경이 아니라 사건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격렬한 반대는 열광적인 박수로 바뀌었다.


이 천장화가 지닌 미술사적 의미는 그것이 샤갈의 후기 생애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이미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망명과 상실을 통과한 화가였다. 그런 그가 국가의 기념물 위에 그린 것은 승리의 서사도, 화해의 교리도 아니었다. 그는 색과 음악, 몸의 움직임이 공존하는 열린 장을 제시했다. 샤갈은 이 작품을 프랑스와, 색채와 자유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던 에콜 드 파리에 바치는 감사의 선물이라 말했다. 이는 귀속의 선언이 아니라 공존의 제안이었다.


파리 오페라 극장 천장화에서 회화는 더 이상 캔버스에 머물지 않고 건축이 되며, 환경이 되고, 국가의 시각적 기억이 된다. 그러나 그 기억은 단일한 이념이나 영웅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음악과 색, 몸과 시간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샤갈은 국가의 천장을 점령하지 않았다. 그는 그 위에 머무를 수 있는 색의 세계를 펼쳐 놓았고, 바로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오늘까지 살아 있는 현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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